'지리산 정신' 산실 단성향교

by 최화수 posted Feb 1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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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경계인 경호강에 걸린 단성교(丹城橋)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산수미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지난날 신안나루(원지)에서 나룻배로 단성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그야말로 인간이 산수화(山水畵)와 합일되는 느낌을 받았을 법합니다.
경호강 맑은물에 금모래가 반짝이고, 적벽산의 층층단애와 먼발치의 웅석봉 웅자까지 어울려 자연의 하모니를 이룹니다.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학문이 깊고 강직한 선비조차 단성을 '단구성(丹丘城)'이라 찬탄했을 정도니까요.

단성은 역사적 전통이나 권위가 상당한 곳입니다. 세종14년(1432) 단성현으로 탄생한 이래 현청이 자리했고, 이웃한 산음현(산청)과 합쳐지고 헤어지기를 거듭하다 1914년에 비로소 산청군 단성면으로 편입됐어요.
원래 가야국에 속했던 이곳은 신라에 병합될 때 궐지국이었다가 경덕왕 때 궐성군으로, 고려시대에는 강성현, 강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진주목(晋州牧)의 속군이 됐습니다.
조선초기 진성현으로 됐다가 다시 강성현으로, 그리고 세종 때 단계현을 병합하여 이름이 단성으로 굳어졌습니다.

경호강을 건너 단성에 들어서는 것은 지리산 뜨락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아요. 단성교를 건너자마자 마주치는 곳이 단성중고교입니다.
이 학교 담장을 끼고 근래 개설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1킬로미터만 가면 유명한 단성향교(丹城鄕校)를 만나게 됩니다. 단성면 강루리 교동마을이에요.
야트막한 산이 소쿠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에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높게 자리합니다. 1127년 강루리 구인동에 세워졌다가 175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는데, 경남 유형문화재 제88호입니다.

향교는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 지방에 설치한 일종의 관립학교입니다.
지방관청 관할 아래 학생을 가르쳤는데, 서원의 발흥으로 인기가 시들하자 한때는 지방유생은 향교에 이름이 올라야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했어요.
단성향교는 현청 소속으로 30명의 학생을 수용했습니다. 건물은 명륜당의 전면을 누(樓)형식으로 꾸며 중앙칸 밑으로 드나들게 한 동선 처리 등에 특색이 있습니다.
향교 안에 '단성 호적장적'(경남 유형문화재 139호)을 보관한 것이 자랑이기도 합니다.

단성향교는 그 규모나 건축기법 등은 눈길을 끌 것이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단성향교는 '지리산의 정신'을 활화산처럼 꽃피운 지리산의 기념비적인 성소(聖所)입니다.
저 유명한 1862년의 '농민항쟁'의 횃불을 이 단성향교에서 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단성 유생과 농민, 요호부민까지 모여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삼정문란을 혁파하기 위하여 역사적인 항쟁을 벌였지요.

단성향교의 향회가 그 중심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단성 농민항쟁은 곧 이어  '진주농민항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한국 봉건사회를 해체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862년의 이 농민항쟁은 민초, 곧 초군(樵軍)들에 의한 근대 민주화 운동의 횃불로서 우리 역사의 빛나는 전환점을 이룬 것이기도 합니다.
농민항쟁은 동학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단성은 신선이 사는 '단구성'이라 했습니다. 신선같이 착하게 살던 농민은 물론, 요호부민까지 어떻게 초군이 되어 봉기를 했을까요?
그것은 서부 경남 주민의 혈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지리산 정신'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지리산은 단성농민 봉기를 필두로 진주농민항쟁, 그리고 동학혁명의 투쟁에도 그 무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농민항쟁의 발원지 단성향교는 그래서 그 의미를 한층 깊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