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by 최화수 posted Jan 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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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개동은 / 항아리 속의 별천지라네 / 신선이 옥베개를 밀어 일어나니 / 순식간에 천년이 지났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세상을 피해 지리산에 은둔할 때 쓴 시입니다.
화개동천 신흥동에는 그이가 바위에 새긴 ‘三神洞’이란 글귀가 있거니와, 이 삼신동의 뜻이 청학동(靑鶴洞)과 비슷하지요.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의 명문명필은 화개동 중심의 쌍계사에서 1000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찬란한 빛을 내고 있습니다.
쌍계사 대웅전 앞의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그것이지요. 쌍계사를 세운 혜소, 곧 진감선사를 기리는 비인데, 최치원이 비명을 짓고 글씨까지 쓴 유일한 비입니다.

왜 갑자기 쌍계사며,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떠올리는 것일까요?
지난 며칠 사이 쌍계사 일대가 환영처럼 아른거리고 있습니다.
쌍계사를 세운 혜소, 그이의 비를 세운 최치원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쌍계사와 특별한 인연을 지닌 두 ‘지리산인’이 아주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일폭포(평전) 불일오두막의 변규화님. 지난해 11월 이래 병원에서 아주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답니다. 서울 대학병원에서 이번 주초 하동의 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만...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참나무 가스가 원인이라는데...
신흥동 법화선원의 법공스님 또한 지난해 서울의 병원에서 병마와 맞서느라 어렵고 힘든 날들을 보냈었지요. 지금은 김해지방 한 사찰에서 요양하고 있습니다.

변규화님과 법공스님이 꽤 오랜 시일 병원 등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니, 필자 개인적으로는 화개동천이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두 분은 특히 쌍계사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지요.
필자에게도 특별한 정을 베풀어준 두 분이기에 현재의 이 힘든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필자가 지리산을 좋아하게 된 것도 변규화님과 법공스님과 같은 분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변규화님과 법공스님 모두 지리산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분들입니다. 지금부터 할 일이 더 많은 분들인데, 불의의 시련이 찾아들 줄이야….
이런 저런 일에 쫓겨 전화만 통하고 상당 기간 찾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은 그저 두 분이 일찍 귀의한 쌍계사, 그 도량을 일으켜 세운 혜소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기려보고 할 따름입니다.
혜소, 진감선사께서 두 분의 건강을 보살펴주시기를 빌어봅니다.
속성이 최씨인 혜소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생선을 팔아 부모를 봉양했다고 하지요.
부모를 여의게 되자 당나라로 건너가 출가를 했습니다.

혜소는 810년 달마조사가 9년을 면벽했던 숭산 소림사에서 계를 받고, 830년 신라로 돌아오기까지 수도정진, 선의 이치를 깨우쳤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군요.
지리산으로 온 그이는 삼법화상이 세운 옛 절터에 옥천사(쌍계사)를 짓고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백성들을 제도했어요.

혜소, 곧 진감선사는 성품에 꾸밈이 없고, 지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였다고 합니다.
그이는 거친 삼베옷이라도 따뜻하게 생각했으며,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 한 가지로 식사를 했다는 군요. 소박하고 조촐한 삶을 몸소 실천한 것이지요.


혜소는 특히 불교음악인 범패음곡을 이용하여 중생들을 제도하였답니다.
그이는 또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지리산 일대에 재배하였으며, 의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이의 특별한 삶의 자취에서 변규화님과 법공스님 두 분이 병마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간절하게 기원해봅니다.

최치원이 어느 산 스님에게 준 시 한 편이 지리산의 산울림처럼 들립니다.
‘스님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 산이 좋다면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 이 다음에 내 자취 한번 보구려 /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려니’
‘청산맹약시(靑山盟約詩)'라고 불리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