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

by 최화수 posted Dec 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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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한 해도 어느덧 저물어갑니다. 묵은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은 행복할 테지요. 하지만 그렇게 행복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 의문입니다. 가는 한 해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수 없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는 것이 민망하게 생각되기도 한 때문일까요.

세밑 스산한 바람이 한층 더 차갑게 느껴지면서 지리산 자락의 운조루(雲鳥樓)를 떠올리게됩니다. 300여년 전 99칸에서 이제는 60여칸의 퇴락한 고옥이 되고 말았지만, 운조루의 쌀 뒤주와 굴뚝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이 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이 지켜온 ‘나눔의 미학’이 정말 감동적이지요.

세상이 어수선하고 생활이 고달플수록 이웃과 더불어 두루두루 나누고 사는 인정이 필요하지요.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섬진강변 지리산 자락, 퇴락한 고가 운조루에서 우리는 비울수록 채워지는 인간적인 모습을 지켜봅니다. 국제신문 12월12일자 ‘최화수의 세상읽기’에 쓴 운조루 얘기를 여기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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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가 닥치면 가난한 사람의 어깨는 더욱 움츠러든다. 수억,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아방궁 아파트'들이 하늘로 치솟고 있는 한편, 햇살 한번 들지 않는 반지하 쪽방과 옥탑방도 부지기수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어쩌고 하지만, 끼니를 굶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부(富)의 양극화 골은 깊어만 간다. 부동산 돈벼락이 곳곳에서 요란한가 하면, 생계마저 잇기 힘든 서민이 줄을 잇고 있다. 외제차다, 홈오토매틱이다 하는 부자들의 떵떵거리는 위세 앞에 가난한 이들은 몸도 마음도 차갑게 얼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세상은 무심하지만은 않다. 거리에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했고, '사랑의 체감 온도탑'도 세워졌다. 오클랜드 부두의 국솥처럼 자선냄비도 펄펄 끓고, 사회복지모금회의 온도탑도 100도를 훌쩍 돌파하리라. 그 온기로 소외 이웃의 한기를 물리쳤으면 한다.

마음은 비울수록 넉넉해진다. 자선냄비의 딸랑딸랑 종소리가 떠올리게 해 주는 것이 있다. 지리산 자락의 퇴락한 가옥 운조루(雲鳥樓)이다.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지은 이 한옥의 곳간채 앞에 쌀뒤주 하나가 놓여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

쌀뒤주 아래편에 직사각형의 마개가 있다. '타인능해'란 다른 사람 누구나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 누구라도 쌀을 마음껏 퍼갈 수 있는 뒤주였다. 주인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편안하게 쌀을 가져가도록 쌀뒤주를 일부러 곳간채 앞에 둔 것이다.

이 집에서는 한 해 200가마의 쌀을 수확했는데, 이 뒤주에서 나가는 쌀이 36가마로 18%에 이르렀다. 이 집의 또 하나 특징은 굴뚝 높이를 1m도 안 되게 아주 낮게 만들었다.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펑펑 올라가 배고픈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염려한 배려였다.

운조루가 자리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소위 '이현상 부대'가 최초로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은 곳이다. 문수계곡 입구인 이 지역은 동학란과 여순병란, 6·25 전쟁의 홍역을 치렀다. 그런데도 대가옥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것은 '타인능해'의 배풂 때문이리라.

세밑의 한파를 녹이는 온기는 자선냄비와 '사랑의 체감온도탑' 눈금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지갑을 여는 시민들이 대부분이다. 자선냄비는 30억 원, '사랑의 체감온도탑'은 1614억 원이 모금 목표액이다. 가난과 소외의 아픔을 덜어줄 사랑의 나눔이다.

하지만 추위가 시작되면 뒤따르는 감성적 기부, 연말연시나 재난 때 기부가 집중되는 것이 문제다. 일회성이 아닌, '일상적인 기부문화'의 정착이 요청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년 열두 달 쌀뒤주의 문을 누구라도 열게 한 운조루의 나눔 정신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아름다운 재단의 '1% 나누기'에 따른 '개미군단의 성장' 등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고무적인 조짐도 엿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재해 및 불우이웃돕기 모금이 65%에 이른다. 정기적으로 지출 계획을 세워 기부를 하는 사람은 10명 가운데 2명인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런 가운데 희망의 싹도 움트고 있다. '매칭 그랜트' 제도를 채택하는 기업체가 늘고 있는 것. 사원들이 개인별로 소외아동 돕기 등을 위한 계좌를 개설해 후원금을 내놓으면 회사가 같은 금액을 지원한다. 우리의 기부문화도 이제는 양적에서 질적인 성장을 꾀해야 한다. 뜻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나눔의 길도 활짝 열려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