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암에서 행복을 얻었네요

by 최화수 posted Oct 2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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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셋째 주말인 21일 구례 오산(鰲山) 사성암(四聖庵)을 찾았습니다.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 제 141, 142호에 ‘지리산 여행, 우연한 기쁨’이란 이름으로 사성암을 찾았던 글을 실었었지요.
그 글을 다시 보니 사성암을 처음 찾았던 때가 2003년 1월 하순이었네요. 그 때 차량으로 사성암까지 올랐었어요. 그 뒤 두 차례 더 사성암을 찾았는데, 계속 차량으로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아침에 부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걸어서 오르기로 작심을 했고, 산 아래 죽마리 주차장에 차부터 먼저 세웠답니다.

시멘트로 포장한 길을 조금 따라 오르니 안내판에 40분이면 사성암에 닿는다고 씌어 있더군요.
정면으로 올려보면 꽤나 가팔라 보입니다. 그래서 오산 정상이 실제 고도 530m보다 훨씬 높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곧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고 숲 속으로 오솔길이 시작됩니다. 가을 햇살이 여름의 꼬리를 잡고 늘어졌는지, 더위가 여간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솔길은 완만하게 지그재그를 그립니다. 뭐, 서둘러 갈 일이 머래요? 하고 묻기라도 하는 듯합니다.

사성암에는 그 사이 달라진 것이 있더군요.
산신각으로 돌아드는 곳에 소망을 기원하는 곳이 새로 생겨났어요. 바위 벼랑에 100원짜리 동전을 잔뜩 붙여놓았고요. 동전이 떨어지지 않으면 소원이 성취된다나요, 어쩐다나요...?
분수대나 샘에 동전을 던져넣는 풍속이 여기선 이렇게 달라졌나 봅니다. 바위 벼랑 투성이인 이곳 환경에 맞춘 소망과 기원의 방식이라고 할까요?

사성암이란 원효, 도선, 진각, 의상 네 고승이 이곳에서 수도정진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군요. 실제 도선 진각 국사가 연좌수도한 좌선바위 등이 자리합니다.
고승이 수도했던 곳이니, 일반 대중에게도 영험한 기도처가 되고도 남겠지요.
기도나 기원과는 전혀 무관한 필자의 경우, 사성암이나 그 위 오산 정상에서 지리산을 건너다보고, 섬진강을 내려다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한 아름의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소망을 떠올리고 하겠습니까.

거리와 시간이 짧기는 하지만 사성암까지 걸어오르면 한 바탕 땀을 흘립니다.
암자 바로 앞에는 주차장이 마련돼 있지요. 승용차와 승합차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아니, 암자 앞마당까지 승합차들이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습니다. 암자에서 마련한 3대의 승합차가 관광버스로 찾은 이들을 산 아래에서 옮겨 태워 오는 것이지요.
사성암의 네 고승도 차를 타고 이곳까지 올랐을까요? 차가 없던 시대였으니, 당연히 걸어서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사성암에서 소원성취를 소망하고 기원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보다 이 특별한 곳(오산, 자라의 산)의 암자를 옛 고승들처럼 걸어서 오르내리면 또 어떠할까요?
사성암은 경관이 빼어난 곳이지만, 암벽밖에는 부드러운 땅이 없다시피 하지요.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기도 주저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오산을 감싸고 흐르는 섬진강과 그 주변 들녘을 내려다보면 어떤 깨우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산 아래에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지요.

사성암의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다시 오솔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후두둑 후두둑, 도토리가 오솔길로 간단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바가지에 구멍 뚫리겠다아~”
누군가가 엄살을 부리면서, 그래도 즐거운 듯이 도토리를 줍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내려오니 비닐 봉지에 도토리를 가득 주워담고 즐거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덩달아 도토리를 줍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다람쥐 양식이니까요.

마을 쪽으로 좀 더 내려오니까 밤나무밭이 자리합니다.
밤나무 아래서 밤 이삭을 줍는 이들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도토리 다음은 밤, 밤 다음은 무엇일까요?
마을로 내려오고 보니, 아, 가을 햇살에 너무나 눈부시게 반사하는 대봉감~~~
가지를 잔뜩 휘어지게 했을 만큼 대봉감의 풍만함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논밭에는 볏가리와 고구마, 콩, 배추, 무가 그득합니다.

행복이란 특별히 달리 자리하는 것이 결코 아니네요.
땀 흘리며 땅을 일구고 가꾸는 그 곳이 행복의 산실입니다.
행복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습니다.
낮은 곳, 더 낮은 곳일수록 행복은 더욱 충만하는 것이로군요.
사성암을 걸어서 오르내리면서 깨우친 것이에요.
낮은 데로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