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3)

by 최화수 posted May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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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신령' 또는 '인간 산신령'으로 불리는 우천 허만수님.
그이가 살았던 세석고원의 '토담집 한 채'의 모습을 필자의 고교 선배이자 신문사 선배인 이종길님의 <지리 영봉>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석산장이 없었을 때는 그 자리에 토담집 한 채가 있었다. 어느 시골집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허만수씨의 보금자리였다.
허씨는 그 토담집에서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고산식물들의 꽃, 속삭이는 솔바람을 벗삼고 살았다.
인정 많은 등산객이라도 찾아들지 않으면 나무 열매,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
그러나 허씨는 세상에 이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19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지리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거의 누구나 우천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거나,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이는 세석고원 뿐만아니라 천왕봉과 거림골 등을 비호처럼 날아다녀 그이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지리산의 조난사고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번개처럼 나타나 도움을 베풀었고, 멋모르고 지리산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움막이 안전한 대피소 역할을 했다네요.

1961년 지리산의 약용식물 채집에 나섰던 조선대학 약학과 학생 13명.
그들은 변변한 야영장비도 없이 해발 1600미터의 세석고원에 올랐지만 허만수님의 초막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답니다.
그들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노금모님은 우천 초막집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지금까지 간직해온 것이지요.

두 장의 흑백사진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움막의 지붕은 억새풀로 덮여있고, 벽체는 나무들을 잘라 차곡차곡 쌓아올렸어요.
축담 하나 없고, 마당도 없습니다.
허름하기 짝이없지만, 집 주변의 자연 훼손이 거의 없어요. 산중의 한 자연세계마냥 자리합니다.

노금모님은 초막 주인 허만수님에 대해 특별히 깊은 감명을 받았고, 세석고원에 체류하는 동안 즐거움도 컸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이는 그 다음해인 62년에 친구 한 명과 함께 다시 세석고원의 우천 움막을 찾아갔답니다.
다음은 노금모님의 증언입니다.

"허만수 선생님은 1년만에 다시 찾아간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더군요.
그이는 밤이 깊도록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어요.
특히 통천문에 나무사다리를 만든 이야기며,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따님 얘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 때는 선생님이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주 밝은 얼굴 모습이었거던요."

조선대학교 약학과 학생들이 세석고원을 찾았던 바로 그 해인 1961년 8월1일에는 지리산 일원에 강력한 태풍인 너러호가 엄습했어요.
당시 부산에서 지리산 등반에 나섰던 언론인 김경렬 일행 24명은 산중에서 비상탈출을 시도했답니다.
그러나 일행 가운데 예닐곱명이 낙오되어 다시 수색대가 출동하는 소동을 빚었어요.
수색대는 가까스로 낙오자들을 찾아내 세석고원의 허만수님 초막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훗날 김경렬님은 다음과 같이 들려주더군요.

"허만수 초막에서 사흘 밤낮을 갇혀 있는 동안 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우리 일행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허만수의 안내를 받아 하산을 시도했다.
우리는 계곡을 피해 거림골의 왼쪽 산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그쪽에도 곳곳에 계곡이 길을 막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천의 도움으로 계곡을 건넜다.
마지막으로 곡점의 큰 하천 격류를 만났는데,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하가 불가능했다.
허만수가 자일을 설치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이의 그 때 그 도움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