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선계곡 은둔자들의 발자취(3)

by 최화수 posted Apr 1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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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최초의 무장봉기를 했던 남도부는 그 이후 지리산 빨치산 전사들의 지휘관으로 용맹을 떨치게 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남도부는 함양군이 배출한 엘리트 지식인이었어요.
남도부의 특별한 이력과 투쟁 역정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소설 <지리산>에 등장하는 20여명은 실존인물들이지요.
이규, 박태영, 하준수, 이현상, 이태, 하영근, 김숙자...이들 가운데 하준수가 곧 빨치산 부사령관 남도부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빨치산 남도부, 곧 하준수는 작가 이병주의 친구였답니다.
1921년 지리산 기슭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이른바 '학병(學兵) 세대'입니다.
소설 <지리산>은 남한 내의 빨치산과 남로당 활동을 최초로 작품에 담은 것이지요.
일제 강점기인 1938년부터 휴전 뒤인 1956년 사이에 있던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징병을 피해 지리산 등에 입산한 청년 학생들이 어떻게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여 투쟁을 벌이는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칠선계곡 입구에 자리한 벽송사가 주요 무대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남도부의 칠선계곡 은거와 무관하지 않겠네요.

소설 <지리산>은 1972년 9월 '월간 세대'에 연재를 시작하여 1977년까지 70회에 걸쳐 실리다가 일시 중단된 뒤, 1985년에야 대단원의 피리어드를 찍었지요.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기도 합니다.
소설 <지리산>은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그린 작품이지요.

소설 <지리산>을 읽으면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 왜 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칠선계곡과 같은 원시수림 속에 은신했는지를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또 이 소설은 이병주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이라고 일부 인사들이 말하기도 하지요.
작가 이병주의 생애도 남도부 못지 않게  파란만장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소설 <지리산>의 상당 부분은 이태의 <남부군>과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합니다.
이태가 자신이 쓴 자서전 형식의 넌픽션 원고를 작가 이병주에게 봐달라고 넘겼는데, 많은 부분이 소설화 되어 <지리산>에 실렸다는 거에요.
...그건 좀 그렇네요.

지난 4월7, 8일 경남 하동에선 '이병주 문학제'가 대대적으로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300여명의 유명 인사들이 몰려왔을 만큼 성황을 이뤘어요.
나림 이병주 서거 14년만에 작가를 위한 기념사업이 본격화 됐는데, 진보 보수진영 구분없이 많은 인사들이 함께 참가하여 눈길을 끌었답니다.

이 문학제와 별도로 이병주 문학전집 전 30권이 도서출판 한길사에 의해 20일쯤 한꺼번에 출간된다고 합니다.
이병주 선생은 부산 국제신문 논설위원과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어요.
필자는 고등학생일 때 국어교사가 국제신문 객원논설위원이어서 사설 원고를 들고 가서 이병주 선생에게 전해주고는 했지요.

이병주 선생은 국제신문 주필로 있을 때 '중립통일론'을 주장한 저서를 공동으로 펴냈다가 징역을 살기도 했지요.
4.19혁명 직후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
소설 <지리산>에서 사회주의자 하준규가 바로 그렇게 물끄러미 은빛 강물을 바라본답니다.
        
[칠선계곡 은둔자들의 발자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과 '이병주 문학제' 관련 얘기를 잠깐 언급했습니다. 해량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