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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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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쪽은 1947년 8월 중순 조선산악회가 주최한 울릉도 학술조사단에 참가한 부산의 신업재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 아래는 2008년 3월10일 한국산악회 부산시지부 제62차 정기총회 기념촬영, 앞줄 중앙 지팡이를 지닌 분이 오점량 한국산악회 상임고문이다.
......................................................
6.25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등산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6.25전쟁이 부산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등산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피난지 부산으로 모여들었고, 산악회는 이들을 모아 국토구명(國土究明) 사업을 계속해 나갔기 때문이다. 1951년 8월 한국산악회는 파랑도(현재의 이어도) 탐사에 나섰으나 심한 풍랑으로 실패했다.

한국산악회는 1952년 9월 제2차 울릉도, 독도 종합학술조사대를 파견했는데, 그 결과 보고강연회를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가졌다. 이를 토대로 정부는 1953년 2월 독도영유권선언을 한 것이다.
1953년 10월 제3차 학술조사대는 독도에 올라 ‘日本領竹島(일본령죽도)’라는 푯말을 파내고 대한민국 영토임을 표시하는 동판과 철제 표지를 설치하였다.

한국산악회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 강점으로 얼룩진 우리 국토를 찾아 본래 얼굴로 되돌리는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산악회의 국토구명 사업은 산악운동이나 등산 활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부산의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고, 등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신업재, 김재문 등 한산 경남지부 기존 회원들이 이런 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부산대학교 문치언, 오점량, 정중환, 김택진, 한형석, 박태권 교수 등이 새 회원이 되었다.

대학교수, 곧 지식인들의 참여는 산악회가 국토구명이나 학술조사활동을 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1946년 6월 창립기념등반으로 지리산에 올랐던 한국산악회 경남지부는 1956년 8월 지리산 학술조사를 겸한 종주산행에 나섰다.
새로 회원으로 가입한 부산대 교수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 교수들의 영향으로 마산과 진주지역의 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들도 다수 참여, 힘을 늘리게 되었다.

지리산 최초의 학술조사 종주산행이 전란의 상처가 채 치유되지도 않았던 1956년에 부산 산악인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올라 노고단까지 종주산행을 하면서 갖게 된 이 역사적인 학술조사활동에는 20여 명의 참여 대원들이 제마다 전문성을 살려 다양하게 전개했다.
역사와 지질, 문화, 민속, 동식물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해 10월 부산 광복동 미화당백화점에선 이들의 첫 지리산 학술조사 결과물들을 전시하는 것과 함께 보고회도 열어 시민들에게 지리산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했다.

현재 한국산악회 상임고문인 오점량 전 부산대 교수는 1956년을 전후하여 지리산을 찾았던  당시의 상황을 부산산악포럼의 ‘부산산악연감’ 창간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때는 교통이 나빠 시간이 많이 걸렸고, 대피소가 없다보니 짐을 많이 가지고 가야 하는데다 장비는 일반적으로 크고 무거워서 힘이 지금보다 두세 배나 더 들었다. 지리산을 등반하는 데는 1주일 이상 걸렸고, 그 때문에 방학 때나 찾아갈 수 있었다.”

오점량 고문은 초기의 등산복은 개인별로 거의 집에서 만들어 입었다며 이렇게 들려준다.
“등산복은 옷가게에서 사 입는 것이 아니라 각자 집에서 만들거나 헌옷을 입었다. 색깔은 주로 진한 원색이 많았는데, 숲이 무성하고 길이 좁아 조금만 떨어져도 앞뒤 사람과의 연락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자라 ‘야호’ 하면서 앞뒤로 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밤은 어디서 굿을 벌이느냐?”
당시 등산복 차림으로 동네 앞을 지나가면 아이들이 따라다니면서 끈덕지게 묻는 질문이었다. 대답하기에도 지칠 정도였다는 것.
요즘의 유명 브랜드의 고가(高價) 등산복 차림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어떨 때는 등산복을 입고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빨치산이 내려왔다며 놀라 숨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점량 고문은 지리산에서 겪었던 일 가운데 ‘목기골의 일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들려준다.
“예상 못한 기후 변화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행히 움막을 발견하여 되살아난 기분으로 하룻밤을 대피했다. 하지만 계곡물을 건너다 포터 한 사람을 잃었다. 자기 과신에 의한 실수였지만, 다음날 중산리와 거림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협곡을 샅샅이 뒤져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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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eon 2009.12.21 18:03
    등산복을 손수 지어 입으시고. . 그 즈음 시대적 정서상으로도 한국산악회의 일은 정말 힘든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깊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어루만져야 했을 테니까요. . .안타까운 희생도 잇따르고. . . 국토구명사업. .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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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화수 2009.12.22 13:32
    20여 년 전만 해도 작업복을 입고 등산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요즘의 등산복의 브랜드화와 견주면 격세지감이 있지요.
    대한산악회의 '국토구명(國土究明)'사업 또한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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