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머리재'와 '동, 서왕등재'(3)

by 최화수 posted Oct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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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도에는 왕등재를 두 곳으로 표기하고 있다. 동왕등재, 서왕등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소막골 위의 동왕등재는 근래 들어 편의상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 같고, 예부터 불러오던 왕등재는 외곡마을과 수철리를 잇는 서왕등재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주장이다.
어쨌든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왕등재'란 그 이름이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정령치', '황령치'란 이름이 마한 피난도성 시절 정장군과 황장군의 역할에서 유래했듯이, 왕등재 곧 왕등치(王登峙)는 글자 그대로 왕이 올랐던 고개였을까?
왕등재에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위치한 북쪽의 산 이름은 왕산(王山)이다. 그 왕산 기슭에는 국내 유일의 피라미드식 돌무덤인 '전 구형(傳 仇衡)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구형왕은 가락국 마지막 임금으로 신라에 나라를 양도해주고 지리산 기슭으로 숨어들었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 때문에 '양왕(讓王)'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는 등의 이설(異說)도 있는 만큼 왕산 돌무덤의 주인공 여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다만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미 성역화 작업도 해놓았다.

어쨌든 수수께끼의 '전 구형왕릉'과 왕산, 왕등재가 거의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다 '왕등재'라고 한 이름이 주목될 만하다.
왕등재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인물은 따로 있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유평계곡 삼거리마을 이상진 이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이는 왕등재 바로 남쪽 외곡리에서 25년을 살아온 ‘왕등재의 사전(辭典’)과도 같았다.

"왕등재에 왕이 올랐다는 얘기는 결코 전설이 아니다. 견고한 토성을 2중으로 쌓았고, 성 한가운데 궁을 지었던 궁터가 남아 있다. 남문 북문 서문도 있고, 궁터에는 기왓장이 남아 있다. 이 중요한 역사의 유적지가 한번도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이의 말이다. 왕등재에 토성과 궁터, 세 성문이 남아 있다니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얘기였다.

당시 필자는 크게 흥분하여 그를 따라 왕등재 일원을 샅샅이 답사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2권에 실려 있다.
그이는 왕등재 뿐만 아니라 유평계곡 전체가 가락국 마지막 왕의 강력한 요새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깃대봉', '망생이봉'(말을 사육한 곳), '도장골'(곡식을 저장한 곳) 등의 주변 지명들을 들이대기도 했다.

사실 왕등재는 여러 가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그 아랫마을 외곡리가 절묘한 천연요새의 지형을 가진 것부터 그렇다. 유평계곡 삼거리마을에서 보면 꽉 막혀 있는데, 병 주둥이 같은 좁은 계곡을 따라들면 놀랄 만큼 넓은 분지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드넓은 목장과 많은 곡식을 거두는 논밭들이 마을과 함께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발 1000m 가까운 왕등재 자체의 신비로움이다.
왕등재는 '물의 고개'로 불릴 만큼 물의 천지이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 일부는 남쪽의 외곡리로, 일부는 북쪽의 수철리 방향으로 흘러내린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펑펑 솟아나 고개 전체가 늪지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산상의 늪지대'에 서식하는 식물들도 아주 다양하다.

"해발 1000m의 고개 위에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져 있다면 누가 믿겠나? 수백 명이 경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에 수천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스탠드까지 설치가 되어 있다. 물론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천연적으로 조성됐다."
이상진 이장의 조크대로 헬기장 남쪽으로 너비 200m, 길이 수백 m의 넓은 운동장 같은 평평한 평지가 열려 있었다.

왕등재를 남쪽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험준한 비탈로, 오르는 일마저도 결코 쉽지 않게 생각된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운동장처럼 드넓은 평지가 열려 있고, 더구나 수초들이 자라는 늪지대가 자리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또 왕등재란 이름과도 관계가 있는 듯한 토성과 궁터도 남아 있어 학술적 규명작업을 하는 것이 시급할 것으로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