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처럼 번져나간 농민항쟁(2)

by 최화수 posted Apr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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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不動産) 대란’은 요즘 세상에만 있는 일이 아닌가봅니다.
조선 철종 13년(1862년) 삼남지방을 휩쓴 민란도 일부 특수 계층의 대토지 소유와 권력층의 가혹한 수탈로 농민경제가 극도로 피폐한 것에서 비롯되었지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는 만석의 곡식을 추수하고 있는데, 그들의 농지는 400결(結) 이하는 없다”고 하여 당시의 대토지 소유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00결의 토지를 한 사람이 소유하면 399호가 토지 소유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19세기 초 충청도 임천(林川)의 경우 전혀 농사를 짓지 못하는 무농층(無農層)이 30.8%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임술 민란이 빈농이나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 곧 초군(樵軍)이 중심 역할을 하는 이유를 알 만합니다.
<정조실록>의 관계 글을 한 번 볼까요.

“권세가들의 탐욕을 온 세상 사람들이 본 받아 수백만 냥의 돈을 팔도에 유통하여 한 뼘의 토지라도 매입할 수 있으면 곧 가격을 더 쳐주어 매입하므로 토지 가격이 수배로 올랐다. 이에 세력 없는 이들은 처음부터 감히 다투어 사들이지 못하여 온 나라의 거의 모든 토지가 세력 있는 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또한 기근이나 흉년이 들면 이 때를 이용하여 강제로 헐값에 사들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약간의 땅마저도 모두 다 이들의 소유가 된다.”-(<정조실록> 2년 7월 정미일)

여기에다 관(官)의 수탈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답니다. 군역(軍役)을 대신하는 군포 징수와 관련된 부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는 군요. ‘백골징포(白骨徵布)’나 ‘황구첨정(黃口添丁)이라 하여 관리들은 죽은 이와 아기마저 그 대상으로 삼아 수탈을 하였답니다. 다산이 지은 시 ’애절양(哀切陽)’은 당시의 가혹한 군포 수탈상이 어떠했는지 들려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갈대밭의 젊은 신부가 곡하는 소리 슬픈데
관청 문을 향한 그 소리 높은 하늘에 울려 퍼지네.
군인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 있다지만
예로부터 이때까지 양근(陽根)을 잘랐다는 말 듣지 못했네.
시아버지 삼년상은 이미 끝났는데 아이는 아직 피도 안 말랐지.
그 이름 군적에 올리었으니 삼대가 군포를 내야 한다네.
잠시 달려가 하소연하니 문지기가 범처럼 지키고 있네.
이정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외양간 소를 끌고 나가네.
남편 칼 들고 방에 들어간 뒤 붉은 피 자리에 가득하다.
아이 낳은 것을 한탄하면서 이같이 궁액을 만든 것이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일은 어찌 죄가 있었겠는가마는
민 땅의 아들 거세한 것은 정말로 처참하다.
(중략)
호사한 집은 일년 내내 풍악소리 요란하건만
쌀 한 톨 한 치의 베도 버리기 아까워라.
같은 동포로 태어난 백성이건만 어찌 후하고 박한 것인가.
여관에 묵고 있는 나그네 신세 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노라.’

조선시대 군정(軍政)의 대표적인 폐단으로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을 들 수 있지요.
국법에는 만 60세가 되면 사망자와 함께 면역(免役)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군역을 다 마친 자의 연령을 낮추어 놓고 강년채(降年債)라는 것을 징수하는가 하면, 사망자에 대해서 체납을 구실삼아 그 자손에게 백골징세를 감행한 것입니다.

또 국법에서는 14세 미만의 소년은 군적(軍籍)에 등록하지 못하도록 돼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생후 3일 된 갓난아기까지 군적에 등록시켜 세포(稅布), 세미(稅米)를 강제로 징수하였습니다. 장정이 되지 않은 황구(黃口)를 군적에 올려 세금을 부과한 것이지요.

이런 폐단이 얼마나 심했으면 남편이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남근을 자르기까지 했겠습니까. 창자를 끊는 아픔보다 더 클 수밖에 없지요.
단성민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삼정의 문란,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아줄 것을 건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1862년 2월4일, 단성민들은 관가로 달려가 창고를 불사르고, 장부를 불태우고 단성현감을 파직시키기에 이릅니다.

단성민들의 봉기와 투쟁을 지켜보던 진주농민항쟁 지도부는 2월6일 당시 진주 서면 수곡리 덕천강변의 수곡장터에서 읍회를 가졌습니다. 단성의 농민 봉기가 진주농민항쟁의 불길을 지핀 것이고, 수곡장터의 읍회로 하여 진주농민항쟁은 맹렬하게 폭발하게 됩니다.
2월14일, 진주 서부지역 농민들이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장터에서 봉기를 합니다.
지리산 천왕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진주 농민항쟁의 불길이 치솟게 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