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신선(神仙)'의 족적(2)

by 최화수 posted Mar 2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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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는 국보 제47호인 쌍계사 대웅전 앞의 진감선사 대공탑비. 사진 아래는 최치원이 짓고 쓴 비문의 일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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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고운 최치원은 28세 때 귀국한다.
귀국 다음 해인 886년 여름, 그이는 왕명을 받들어 경주에서 지리산 화개골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신라 50대 정강왕(定康王) 원년이다.
정강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삼법화상(三法和尙)에 이어 도를 크게 깨친 혜조(慧照)에게 ‘진감선사(眞鑑禪師)’라 시호하고, ‘대공령(大空靈)’이란 탑호(塔號)를 내려 비를 세우도록 하면서 고운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고 글씨도 쓰게 하였다.

정강왕은 절 앞에 두 개의 시내가 합쳐서 흐른다는 말을 듣고 ‘두 시내가 흐르는 곳’이라는 지형을 따서 옥천사(玉泉寺)로 불리던 절 이름을 ‘雙磎’라고 고쳐지었다.
최치원이 절 입구의 두 자연석에 ‘雙磎’ ‘石門’이라고 새긴 것도 왕명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에오라지 도(道)는 사람에게 떨어져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그 나라가 서로 다름에 매여 있지 않는다.’
“최 고운이 지은 ‘진감선사 대공탑비문’은 한 고승의 행적비이기에 앞서, 차라리 시비(詩碑)로, 또는 문학비로서 우리나라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에 있다.” - 김경렬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 2>

무염국사 백월보광탑비, 지증대사 적조탑비, 초월산 승복사비,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이른바 우리나라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이다. 이들 비문은 모두 고운 최치원이 지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운이 짓고 쓴 쌍계사의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뛰어난 글씨를 거의 완벽하게 남겨서 전해오고 있다.
훗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쌍계사의 진감선사 대공탑비문을 탁본(拓本)하여 중국에 보냈는데, 출중한 고운의 서체를 중국에서 글씨 교본으로 삼았다는 것.

쌍계사 대웅전 앞에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1000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이 사찰을 찾는 모든 이들의 특별한 관심을 모으게 한다.
그렇지만 이 탑비는 노천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또한 전란의 총상 흔적까지 안고 있기까지 하다.
세월의 흐름 앞에 글씨의 마모 현상도 두드러져 보인다.
국보를 이런 식으로 관리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따르기도 한다.

화개동천의 심장부인 대찰 쌍계사.
그 출입문이나 다름없는 자연 석문에서 우리는 고운 선생의 ‘쌍계’ ‘석문’ 문향과 접한다.
그리고 대웅전 앞뜰에서 우리는 그이의 1000년 문향(文香)과 마주치게 된다.
돌이 아니라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와도 같다.
고운 최치원의 숨결이 1000년 시공을 넘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쌍계사를 찾는 기쁨이 넘쳐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