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梅泉) 황현의 나라사랑(1)

by 최화수 posted Feb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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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곽종석 선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매천 황현(黃玹) 선생이다. 매천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節命詩) 4편을 남기고 자결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 천은사 입구, 그가 살던 곳에 매천사(梅泉祠)가 세워져 있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시름 / 무궁화 이 세상은 가고 말았다 / 책 덮고 지난 역사 헤아려 보니 /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소 그려'
매천의 절명시 4수 가운데 1수이다.
  
매천사가 자리한 곳은 지리산 기슭의 작고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하지만 화엄사~천은사 도로와 구례~남원의 19번 국도에서 성삼재로 오르는 포장길이 이 마을에서 마주친다. 지리산을 찾는 자동차들이 이 마을 앞을 많이 지나친다.
천은사 2㎞ 못 미친 천은제 아랫마을에 자리한 '매천사(梅泉祠)'는 한말 대문장가, 시인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의 애국충절을 기려 구례 유림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면암 최익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다 대마도로 끌려갔다. 그는 "내 어찌 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면서 단식 끝에 1906년 굶어 죽었다.
그이의 시신이 부산항으로 돌아오자 팔도의 백성이 포구로 몰려들어 발을 구르며 죽음을 애도했다.
이 때 꾀죄죄한 행색에 괴나리봇짐을 멘,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갓을 쓴 사팔뜨기 시골 선비 하나가 목을 놓아 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 6수를 놓고 갔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가 남긴 글 가운데는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디 메에 임의 뼈를 묻어오리"란 뜻의 한시가 들어 있었다.
삼천리 강산이 왜놈 땅이 되었는데, 시신이 되어 돌아온들 묻을 곳이 그 어디냐는 외마디 절규였다.
그제서야 좌중은 좀 전의 그 시골뜨기가 바로 매천 황현임을 알고 놀랐다.
운집한 군중의 수백 수천의 만사 가운데 그의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황현은 최익현이 세상을 떠난 네 해 뒤인 1910년 한일합방 소식에 식음을 전폐한 뒤 음독,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천 황현 선생은 1855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황희 정승의 후손이지만 가계가 가난하고 몰락하여 농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행히 조부가 가세를 일으켜 아버지는 황현의 입신양명을 위해 집에 천 권의 책을 비치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
황현은 2~3세 때 숯덩이를 들고 다니며 글씨 쓰는 시늉을 하였으며 7세에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때 지은 시가 전해온다.
매천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체격은 작고 약했지만 총명하였고, 특히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29세 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으나 시골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밀려났고 회시(會試)도 나라 형편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34세 때 다시 부모의 간곡한 뜻에 따라 상경하여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부패를 개탄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구례로 내려가 칩거해 버렸다.
안타까이 여긴 벗들의 거듭된 상경 요청에 그는 "어찌하여 나를 귀신같은 나라의 미친놈들(鬼國狂人) 속에 들어가 같이 미친사람이 되라 하는가" 라며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