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靑鶴)이 금세 날아오를 듯(2)

by 최화수 posted Jun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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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촌 마을의 원래 서당은 싸립문이 굳게 잠겨 있다(사진 위). 새로 세운 청학동 전통서당은 천제당 바로 옆에 자리한다(사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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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른바 ‘도인촌(道人村)’이라 불리는 청학동을 처음 찾아갔던 것은 1981년 초여름이었다.
부산역 앞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는 한 안내산악회의 대절버스에 편승하여 거의 5시간을 시달린 끝에 청학동에 닿았다.
명색이 산악단체였지만, 고작 도인촌을 둘러보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 삼신봉 산행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상투머리나 댕기머리를 한 도인촌 사람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청학동과 연결되는 도로 사정은 아주 열악했다. 왕복 1차선 비포장도로가 꾸불꾸불하게 이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이처럼 교통편이 열악했던 1980년대에도 도인촌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유불선경정유도’란 종교를 신봉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양식을 이어가고 있는 지리산 도인촌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청학동 주민은 20여 가구 100여 명으로 한복 차림에 처녀 총각은 머리를 땋아 댕기머리를 마고, 남자 어른은 상투를 틀고 여자 어른은 쪽을 진 전통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 어린이들은 학교 교육 대신 마을 서당 훈장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주민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현대 속의 전통생활’이란 측면에서 외지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마을 이름을 ‘도인촌’,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도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TV 안테나가 서 있는 것이나, 한복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경운기를 몰고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관광객들은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마을을 쏘다니며 안방과 부엌의 세간을 들여다보고는 “왜 TV를 보느냐?” “세탁기도 쓸 줄 아느냐?”라고 묻거나, “한복을 입으면서 어째서 운동화를 신고 있느냐?”는 등으로 간섭을 하고는 했다.
이 바람에 도인촌 사람들은 전통 규범을 지키기에 어려움을 겪는다고도 했다.

바로 그 때문에 청학동은 1989년 당시 개방과 폐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빚고는 했던 것이다.
도인촌 아이들은 어느날부터 관광객들과 기념사진 촬영마저 거부했다. 서당 훈장어른이 엄명을 내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결국 마을 서당을 벗어나 인근 초등학교로 가서 공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도인촌의 일부 가정집에 ‘민박’이란 간판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청학동 도인촌은 그들만의 세계로 더 이상 닫혀 있지 않았다.
외부 세계와 통하는 문을 하나하나 개방한 것이다.
관할 행정관청인 하동군에서도 청학동 관광개발계획을 세워 많은 투자사업을 벌여왔다.
무엇보다 청학동에 이르는 도로를 왕복 2차선으로 말끔하게 확, 포장하고, 삼신산 터널을 뚫어 산청군 시천면과 연결하는 관광도로도 열었다.
천제당과 서당이 새 모습을 갖추고 버스 정류장 주변의 편의시설물들도 들어섰다.

그렇지만 현재의 도인촌은 20년 전보다 오히려 더 조용한 듯하다.
어째서일까?
현재는 도인촌보다 바로 이웃한 ‘삼성궁(三聖宮)’으로 관광객이 집중되고 있다.
팬션과 식당, 기념품가게 등의 시설도 도인촌이 아닌, 청학동 골짜기 전체로 퍼져 있다.
도회지 어린이들을 불러 모으는 ‘예절학교’니 뭐니 하는 ‘청학동 서당’들도 마찬가지다.
지난날 다랑이 논밭이던 청학동 골짜기가 상전벽해를 이루고 있는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