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지리산 사람'의 하산(2)

by 최화수 posted Apr 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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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 함태식 님이 지난 4월18일 산 아래의 새 보금자리인 '피아골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지리산 종주산행 챔피언' 이광전 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
<사진 아래> 피아골대피소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물통. 함태식 님의 '예술적 안목'(?)이 깃들어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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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왕성한 40대에 지리산에 들어왔는데 하산을 하려고 보니 어느새 80대 노인이 되어 있구만요.”
40대와 80대, 그 시간적 간격은 40년이지만 마음의 거리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또한 ‘영원한 지리산 사람’으로서 그 산을 내려오는 마음은 가슴속에 얼마나 큰 공터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함태식 님이 지리산 지킴이로 평생을 봉사하다가 노령으로 이제 산을 내려오지 않을 수 없게 됐지만, 당장 기거할 집도 절도 없어 난감해 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인천에 아들집이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40년을 지리산속에서 살았던 이가 어찌 도회지의 삶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노고단대피소에서 16년, 피아골 대피소(왕시루봉 왕증장 포함)에서 22년을 봉사했으니 끝까지 피아골에 머물게 하는 것이 옳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렇지만 피아골에서 위독한 상황을 맞아 구급대가 출동하여 그이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그 때문에도 하산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깊은 산중이다 보니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떨 때는 김치 한 가지로 술을 마시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드러눕는 일까지 생겼나 봅니다.”
깊은 산속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 공기 맑고, 물 맑고, 조용하니 낙원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먹는 것에서도 해방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산중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닐 터이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아무래도 기력(氣力)이 점차 딸리기 마련이고, 고독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공허한 마음을 메우기가 어려울 법도 하다.
피아골대피소는 주능선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함태식, 그이가 누구인가?
‘노고단의 전설’이 아니던가.
“조용히 하라. 깨끗이 하라!”
수백, 수천 명의 산꾼들에게 쩡쩡 울리는 소리로 호통을 치던 ‘노고단 호랑이’가 아니던가.

그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또 있다.
자신과 함께 지리산을 지켜왔던 ‘지리산 지킴이 1세대’들이 하나 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사실이다.
최인섭, 변규화 님처럼 세상을 등진 이들도 있고, 우종수, 조재영 님처럼 일선에서 은퇴한 이들도 있다. 지리산에는 그이 혼자 남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창서 선생이 법정에서 싸우고 있다는데…산사람들에게 후광 대신 고난을 안겨주니, 참 기가 막히지요.”
그이는 설악산 권금성을 걱정했다가 다시 광주의 거시기산악회 이돈명 회장(전 조선대 총장)의 건강을 걱정한다.
이돈명 회장은 1992년 9월20일 피아골에서 거행한 아들 함천주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이 때만 하더라도 설악산 권금성산장의 유창서, 사진작가 김근원, 한국등산학교 안광옥, 한국산악회 조두현 님 등 내로라 하는 산악인들이 대거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 옛날 이현상 부대가 피아골 축제를 벌인 이래 함천주의 야외 결혼식이 피아골 최대 결혼잔치로 장식했던 것.
하지만 이제는 그 모두가 함태식 님에겐 추억의 앨범 속으로 묻혀들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