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지리산 사람'의 하산(1)

by 최화수 posted Apr 1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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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는 함태식 님이 16년 동안 지켜온 피아골대피소. 함태식님이 떠난 하루 다음날(4월18일)의 썰렁함 모습이다. 사진 아래는 함태식님이 하루 앞날(4월17일) 옮겨온 새 보금자리 피아골탐방지원센터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같은 날짜의 사진인데 나무잎새들이 두 곳의 기온 차이를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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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17일 ‘영원한 지리산 사람’ 함태식 님이 38년만의 지리산중 생활을 끝내고 하산을 했다. ‘대한민국 산장지기 1호’의 하산이다.
해발 800m, 피아골 삼거리의 피아골대피소를 떠나 4K 아래 직전마을 입구의 피아골 탐방지원센터 새 보금자리로 옮겨왔다.
탐방지원센터는 연곡사 바로 아래에 있는 ‘피정의 집’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야영장, 화장실, 주차장과 함께 단층의 아담한 건물이다.

피아골 탐방지원센터는 국립공단 지리산 남부관리소 소속 직원들이 사무실로 이용하면서 피아골 탐방객들을 위해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는 곳이다.
지리산관리사무소는 이 건물 가운데 직원 숙소로 사용했던 공간 33평방미터(10평)를 할애, 방 2칸과 수세식 화장실, 부엌 등을 마련하여 ‘영원한 지리산 사람’의 ‘산 아래 보금자리’로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거처할 집이 마련됐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하여 여러 신문과 방송의 보도, 그리고 ‘지리산지킴이를 지리산에서 내쫓는 처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자 국립공단에서 급히 2천만 원을 들여 내가 거처할 수 있는 곳을 꾸며주었다오.”
바로 직전까지 하산을 하더라도 살 집이 없어 걱정했던 것에 견주면 다행한 일이었다.
“평생 무지렁이 건달로 살다 보니 남은 것은 통장에 10만 원밖에 없다”고 한 그의 말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저기 피정 집(천주교 광주대교구 기도하는 집) 신부님이 어제 잠시 다녀갔는데, 아침에 장롱이며 집기들이 배달됐어요. 신부님이 2백만 원어치나 선물을 하셨구만.”
함태식 님 따님은 수녀로 현재 로마에서 활동 중이다.
‘피정 집’ 신부님이 피아골대피소에 들렀다가 함 선생의 따님 이야기 등을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
함 선생은 이렇다할 세간 한 가지도 없었는데, 뜻밖에도 신부님이 그 어려움을 해결해준 것이다.    

‘영원한 지리산 사람’, 필자에게는 ‘노고단 호랑이’로 더 깊이 각인 돼 있는 함태식 님이 하산한 바로 다음날인 4월18일 만사를 젖혀두고 피아골로 달려갔다.
이 날 열리기로 했던 함태식 님의 하산행사가 22일로 연기된 것을 알았지만, 토요일이 아니면 시간을 낼 수가 없어 그냥 나 혼자 차를 몰고 갔다.
피아골 탐방지원센터 앞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썰렁했다. 그런데 건물로 다가가자 바른쪽 끝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들여다보다 함태식 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 최화수입니다.”
“아이구, 최화수 선생. 이거 얼마 만이오?”
그이가 반갑게 달려 나왔다. 그 언제였던가, 함 선생이 왕시루봉 왕증장에 머무르고 있을 때 부엌에서 취나물을 묻히고 있다 나를 반겨주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안녕하세요, 함천주입니다.”
함 선생의 아들도 반겨준다. 피아골에서의 야외결혼식을 지켜본 것이 떠올랐다. 인천에서 어젯밤에 도착한 그는 방에 불이 꺼져 있어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