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길, 지리산 가는 길(6)

by 최화수 posted Mar 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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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미륵산의 케이블카 시설물. 이 산의 정상은 고작 해발 461m로 용화사 입구에선 어느 쪽으로 오르든지 도보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그런데도 더 수월하게 오르고자 이런 시설물을 정상 턱밑에까지 설치했다. 지리산에도 케이블 카 설치를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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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여름, 나는 처음으로 지리산 단체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남녀 희망자가 40여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다.
불문곡직하고 남성과 여성을 적절하게 섞어 조(組) 편성을 했다.
막영과 취사 장비 등 모든 준비물은 조 단위로 마련하고, 산행도 조 단위로 하게 했다. 낙오자가 생길 경우 조장 인솔로 조원 전체가 비상탈출을 하도록 규정했다.

처음 만난 젊은 남녀라도 종주산행을 하는 동안 ‘한 지붕 한 가족’이 되었다. 한 텐트에서 잠자고 밥도 함께 지어 먹어야 하니까.
당시에는 텐트와 버너 등의 장비는 물론, 주부식(主副食)까지 무거운 것 일색이었으므로 그 운반을 위해서는 남녀 같은 비율로 조를 편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런 것에 종주산행의 또 다른 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 편성이 되면 조원들끼리 준비물을 분담했다. 텐트와 취사도구 등은 주로 남성이, 주부식은 여성이 맡았다.
여기에서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빚어졌다.
‘찌개거리’를 맡은 한 아가씨가 자갈치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을 구입, 배낭에 넣어 지리산 주능선까지 메고 온 것이다.
그렇지만 생선은 폭삭 썩고 말았다. 여름날의 그 폭염을 생선이 어찌 이겨내겠는가.

당시에는 산행 채비를 제대로 갖추지도 않고 지리산 주능선에 오른 이들도 적지 않았다.
토끼봉에서 까까머리의 한 젊은이가 나에게 다가와 대뜸 이런 제의를 했다.
“아저씨 배낭을 대신 메어줄 테니 밥만 좀 먹게 해줄 수 없겠수?”
나는 가벼운 내 배낭이 아니라 추리소설가 김성종 님의 무거운 배낭을 부탁했다. 종주산행이 처음인 그이의 지게배낭에는 필요이상 너무 많은 짐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발이 빠른 까까머리 청년을 한번 시야에서 놓친 우리는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불현듯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
‘배낭 도둑’에게 당한 것이로구나!
나는 김성종 님의 배낭을 메달라고 부탁한 ‘원죄’가 걱정이 되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괜히 남의 선심까지 의심한 나의 또 한번의 잘못을 부끄러워해야만 되었다. 그 까까머리 청년은 야영지인 세석고원에 먼저 도착하여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청년은 제대를 한 기념으로 지리산을 찾기는 했는데, 장비가 없어 맨몸으로 주능선에 올랐다는 것이다.
건전한 청년을 괜히 도둑으로 의심을 한 부끄러움이 참으로 컸다.

우리는 그로부터 매년 여름 어김없이 단체 지리산 종주산행을 했다.
지리산 주능선에 지금과 같은 현대식 산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들은 ‘한 지붕 한 가족’의 갖가지 해프닝을 연출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렵고 힘들었던 것일수록 더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멀고도 먼 지리산’이었기에 그 하나하나의 삽화들은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이리라.

지리산을 찾아다닌 세월이 어느새 30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한번 찾아가기에도 참으로 멀고 먼 지리산 길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 빨치산 투쟁이 안겨준 어두움의 공포 때문에 지리산은 유독 더 멀리 생각되었던 것도 같다.
그 지리산이 요즘 부쩍 가까워졌다. 산허리와 능선을 자르고 도로가 개설되었다.
요즘은 그것도 모자라 천왕봉 턱밑에까지 케이블카를 놓겠다고 야단들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