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집 '느티나무산장'(2)

by 최화수 posted Sep 1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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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는 원래의 '느티나무집'을 다시 지은 것. 느티나무산장의 가장 남쪽에 있다.
다음 사진은 뒤편의 독립펜션 쪽에서 바라본 남쪽의 쌍동이형 펜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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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지리산과 같은 든든한 터전을 다진 이들이 많다.
민족분단, 비극의 살벌한 현장이었던 지리산, 그러나 다시 평화를 되찾은 지리산은 그로부터 축복의 땅으로 바뀌었다.
백무동 느티나무산장 대표 문호성 씨도 지리산의 축복을 듬뿍 받았다.
문 씨 부부가 백무동계곡에 처음 보금자리를 열었던 것은 20대 청년시절이었던 1979년이었다.

1980년대, 백무동 ‘느티나무집’은 늘 손님들로 넘쳐났다.
그 많은 손님들을 가족처럼 정겹게 맞이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젊은 집주인 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주인인 조귀자 씨는 첫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묻혀 살다시피 했다.
남편 문 씨는 당시 함양농협에 근무했는데, 직장이 끝나기 바쁘게 집으로 달려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가장 부지런한 젊은 부부였다.  

그 때는 계곡과 접해 있는 야영장도 느티나무집 소유였다. 주택과 합하면 무려 900여 평의 넓은 면적이었다. 느티나무집은 이처럼 사설 야영장을 갖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부산소설가협회는 이 집 야영장을 빌어 ‘여름소설학교’를 여러 차례 열었다.
문 씨 부부는 양옥의 모든 방은 손님들에게 내주고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별채의 식당에 딸린 단칸방에서 숙식을 했다.

문 씨는 외래 손님들이 넘쳐나자 1988년 직장(함양농협)도 그만두고 송어양식장을 여는 등 느티나무집을 더 알차게 가꾸었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때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도회지에서의 생활을 꿈꾸었다. 그가 군에서 제대를 앞두었을 무렵 형이 먼저 백무동에 집을 지었다. 그도 군에서 제대하면서 백무동에 집을 짓고, 10년 20년 앞을 대다본 휴양지 터전 마련에 젊음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문호성 씨는 ‘느티나무집’을 ‘느티나무산장’으로 키웠다. 하지만 그가 그것만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호성 씨는 일찍부터 함양군 마천면 청년들로 구성된 마천애향회를 이끌면서 지리산 주능선 북쪽 자락 중심에 자리한 마천의 향토사료 등을 발굴, ‘마천향토지’를 펴내기도 했다.
이 ‘마천향토지’에는 6.25 전란을 전후하여 마천보루를 둘러싼 격전 등 귀중한 자료들을 당시 주인공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담고 있다.

문호성 씨는 또 지방자치시대가 열리면서 함양군의회 의원으로 뽑혀 마천을 비롯한 지리산 지역 주민의 복지 향상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요즘의 문 씨는 마천산악회 회장으로서 더 보람 있고 의욕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
지리산 현지 산악회로서 ‘지리산 산행’문화의 올바른 초석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
지리산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좋은 이미지를 심는 것에 보람을 찾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