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5)

by 최화수 posted Oct 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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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이 머리 풀고
곱추춤을 자꾸 춘다

통곡이 한이 되고
붉은 망개 된 저 억겁

눈시울 붉힌 영혼아
시려버린 영혼아

내 안의 긴 서러움
그 묻혀진 세월 털고

잔잔히 내리쬐는
햇살 한줌 보듬어서

그립게 환생하는 날
긴 번민의 살도 풀자'
                      -김용규님의 <방곡 가는 길>

비극의 지리산 골짜기를 고향으로 두고 교단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김용규님이 지난 호 칼럼의 댓글 자리에 올려준 시이다.
지리산 비극을 대표하는 방곡마을, 그 방곡으로 찾아가는 길에서 외치는 김용규 시인의 절규가 정말 절절이 가슴에 와닿는다.
김용규님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방곡리의 양민 학살 사건도 앞의 '산청, 함양사건 전말...' 책에 실린 내용에서 발췌 소개한다.

[설 이튿날 이른 아침 가현마을을 죽음의 세상으로 만들어놓은 국군 부대는 이어 방곡마을로 들이닥쳤다.
오전 10시께였다.
"좋은 소식 전해 주겠다"는 식의 달콤한 말을 했다. 주민들을 불러내는 군인들의 말에 가현마을에서보다 영악한 기교가 붙은 것이다.

하지만 주민이 빠져나온 집은 군인들이 어김없이 불을 질렀다.
주민들을 논바닥으로 내몬 군인들은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들은 아랫논으로 내려가게 했다.
중대장인 듯한 군인이 주민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 식구들 중 젊은 놈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부녀자와 노인들만 남았다. 그 젊은 놈들은 다 어디 갔나?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 죽여버릴 것이다."
하지만 주민 누구도 자식이나 남편의 행방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군인들은 아랫논에 있는 남자들을 향해 "모두들 다 뒤로 돌아 앉아"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모두들 눈 감아" 하고 명령했다.

눈을 다 감았다 여겨지는 순간 무자비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거기에 키빈총 소리, 엠원 총소리가 더해졌다.
사람의 몸이 갈갈이 찢기고 형체가 해체되고 논바닥에 흩어지는 살육의 마당, 살육의 난장이었다.
살육의 난장과 만나는 자리에는 인간은 없고, 문화도 없는 말하자면 '영점지대'인 것을!]

'산청, 함양사건 전말...'-이 책을 쓴 시인 강희근 교수는 여기서 이렇게 묻고 있다.

"작전지구인 금서면 골짜기가 군인의 눈에는 그렇게 몰가치한 것으로, 그렇게 깊은 능멸의 대상으로 보였던 것일까?
지리산 골짜기에 사는 곤고한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위로도 없고, 진실의 언어도 따로 가는 지옥 영벌의 단죄만이 있는 것으로 오판했던 것일까?"

[군인들은 다시 윗논으로 올라왔다.
비명소리가 죽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이번에는 노인과 아녀자들, 어린이, 젖먹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다시 아비규환의 지옥불이 총구에서 뿜어나고, 연약한 육신이 짓뭉개지는 데서 무법의 가학으로 붙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와 어머니, 이모와 고모, 누나와 누이를 인륜의 자리에서 식탈하는 짐승의 인장을 유감없이 찍었다.
어떤 시체는 숯검정으로 바뀌었고, 어떤 시체는 타고 있었고, 살과 피와 뼈와 내장은 모두가 일탈하여 흙으로 가있거나 논두렁 마른 풀대에 얹혀 있었다...](후략)

...방곡마을에서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주민이 212명이나 되었다.
더욱 안타깝게도 유골마저 그 이후 묵은 논 개간으로 마을밖 어딘가로 옮겨져 매장되고, 그곳을 또 다른 이가 개간하면서 영영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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