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산장과 '무장비 등산'(5)

by 최화수 posted Sep 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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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 자동차가 오르게 되면서 이 곳에서 지리산 종주산행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종주산행이 아니라 하루 코스로 피아골이나 뱀사골 산행을 하는 이들도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올라 노고단을 거쳐 가는 경우가 많아졌지요.
노고단 턱밑이라고도 할 성삼재가 산행 기점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지리산 종주산행만은 고집스럽게도 화엄사 입구 황전리에서부터 시작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십명의 회원이 참가한 산악회의 단체 종주산행에 참가하고서도 성삼재로 오르는 대절버스를 황전리에 세우고는 그 곳에서 차를 내려서 화엄사 골짜기를 걸어서 오르는 이들이 있지요.

필자도 종주산행만은 반드시 화엄사 입구에서 걸어서 오릅니다.
그 때문에 함께 종주산행에 나선 이들과 하루 낮 정도 떨어져 있는 일도 생깁니다. 화엄사 입구에서 코재를 거쳐 노고단까지 오르는 길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거의 전구간이 돌계단길이다보니 관절에 많은 무리가 따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왜 화엄사 골짜기를 걸어서 오르기를 고집하는 것일까요?

필자의 경우 지리산 종주산행은 주능선까지는 산 아래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올라야 한다는 나름대로 굳어진 생각을 갖고 있어요.
종주산행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야 없겠지요.
다만 종주산행 첫날 무거운 짐을 메고 주능선까지 걸어서 오르는 과정의 그 힘든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성삼재 종단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그 누구인들 화엄사 입구에서 걸어서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지난 1980년대까지는 주능선의 대피소에서 잠자리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종주산행이라면 야영을 원칙으로 하다시피 했어요.
그러니까 야영, 취사장비 등 그 무거운 짐을 메고 화엄사 골짜기를 오르던 '고통'을 누구나 감내했던 것이지요.

80년대에 지리산 종주산행을 했던 이들 가운데 지금도 화엄사 입구 출발을 고집하는 이들의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때의 그 고통이 아름답고 달콤한 추억으로 되살려지는 때문일 것입니다.  
힘들게 군대생활을 했던 이들일수록 지나간 군인시절을 더 유쾌하게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네요.

1988년 노고단에 새롭게 들어선 3층 양옥의 현대식 새 노고산장은 여러 가지 큰 일들을 만들어냅니다.
노고단 터줏대감 함태식님을 피아골 골짜기로 내려보낸 것부터 큰 사건(?)이었습니다.
지리산 주능선에 난방과 전기시설을 갖춘 대규모 산장이 들어서고, 국립공단 관리공단이 그 산장을 직영하는 사실도 굉장한 것이었지요.

더구나 새 노고산장은 '무장비 등산시대'를 선언했답니다.
자동차로 성삼재까지 올라 맨손으로 노고단에 오른 이들에게도 야영장비와 취사도구를 임대해주고 주부식도 살 수 있게 하여 산상 야영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지요.
이론적으로는 아주 획기적이고 좋은 일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100년 앞은 고사하고 바로 한 치 눈앞도 내다보지 못한 엉뚱한 발상이었습니다.

'무장비 등산시대'를 선언했지만, 그것은 1988년 한해 여름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답니다.
텐트며 버너며 코헬을 빌려 쓰는 것은 좋은데, 그 훼손의 정도가 감당이 불감당이었다는 거에요. 텐트는 태워먹고, 버너는 고장내고, 식기는 망가뜨리고...산상 장비 임대 질서가 엉망이었던 것이지요.
그들 대부분은 산악인이 아닌, 유산객들이었으니, 능히 짐작할 만하다 하겠네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리산 주능선의 현대식 산장 건립에 뒤이어 야영장 폐쇄 조처가 내려진 것이지요.
사실 노고단, 세석고원, 장터목, 벽소령 등은 산상 야영에 따른 자연훼손 상태가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거던요.
야영을 금지하고, 야영장으로 맨땅이 된 곳에 자연생태계를 원상복원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 돈과 노력이 소요됐습니까.

'무장비 등산시대'란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말아야 했던 운명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