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산장과 '무장비 등산'(4)

by 최화수 posted Aug 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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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MOUNTAIN)' 올 8월호 '이 한장의 사진'에는 1985년 8월 사진작가 김근원님이 촬영한 세석산장의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능선 멀리서 촬영하여 작은 산장이 더욱 작게 보이는 군요.
1985년의 세석산장, 그것은 함태식님이 16년 동안 지켰던 노고산장처럼 작고 초라한 대피소였답니다.
하지만 당시 세석철쭉제나 지리산 종주에 나섰던 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듬뿍 안겨준 곳이기도 합니다.

'마운틴'에 실린 '이 한 장의 사진' 1985년의 세석산장 모습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당시에는 세석이든 노고단이든 장터목이든 협소한 산장(대피소)에서 묵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특히 한여름철 종주 인파가 집중될 때는 대피소는 조난객을 수용하는 장소로 그 역할을 하는 정도였답니다.
그 때는 종주산행을 하는 이들은 거의 누구나 야영을 하는 것이 불문률이나 다름이 없었어요.

1980년대, 갑자기 몰아친 레저 열풍으로 등산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렇지만 등산장비 개발은 아직 원시수준이었어요.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당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하는 이들은 엄청나게 무거운 야영장비와 부식 등을 메고 많은 땀을 흘려야만 되었답니다.
야영이 금지돼 있고, 장비와 부식이 초경량화 돼 있는 지금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까요.

성삼재 종단도로가 1987년에 준공되고, 노고단에 현대식 산장이 문을 연 것은 1988년 1월 9일이었지요.
차량으로 성삼재에 올라 수월하게 노고단에 접근한 것도 그 때부터 가능했어요.
그 때까지는 지리산 종주산행을 하는 이는 누구나 화엄사에서 걸어서 노고단에 올랐던 것이지요.
종주 첫날 배낭의 무게는 굉장할 수밖에 없었고, 워낙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다보니 비탈이 심한 '코재'의 악명도 높았던 것이예요.

요즘에는 태극종주라 하여 인월의 덕두산에서 서북능선과 주능선을 지나 산청의 웅석봉까지 코스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아 상당한 부담이 따를 테지요.
그렇지만 지난날 화엄사~노고단~천왕봉~대원사의 종주산행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어요.
바로 야영장비와 주부식의 엄청난 무게 때문이었지요.

80년대에는 요즘과 같은 가스버너가 없었답니다.
주로 석유버너였고, 고급품으로는 스웨덴제의 무거운 쇳덩어리가 있었지요.
석유버너인 까닭에 배낭 한쪽에는 석유통을 매달고 다녔고, 점화용 알콜도 별도로 갖고 다녀야 했습니다.
한여름철에는 석유통이 무거운 데다 귀찮고 하여 서로 마주치는 등산객과 물과 석유를 맞바꾸는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었어요.

노고단, 세석고원, 장터목, 벽소령 등은 야영장으로 급속히 잠식되었지요.
이곳들을 원상복원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도 80년대까지는 지리산 종주도 야영이 원칙이었습니다.
1988년 오픈된 국립공단 직영 현대식 노고단산장도 야영을 권고했답니다.
심지어 '무장비 등산시대'를 연다면서 텐트와 침낭, 코헤르와 버너 식기 등을 빌려주고 주부식을 팔기까지 했으니까요.

아, 그러니까 노고단 턱밑인 무넹기고개에선 기막힌 현상이 빚어졌답니다.
무거운 야영장비 등을 메고 화엄사에서 가파른 코재로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른 이들의 눈앞에 반바지에다 슬리프를 끌며 오직 부채 하나만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며 노고단으로 오르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올라 노고단에서 제공하는 야영 취사장비들로 산뜻하게 산상의 낭만을 즐기는 이들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