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유담(龍遊潭)과 엄천(嚴川)(3)

by 최화수 posted Oct 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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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休川)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엄천은 이름 그대로 지리산 계류가 마치 쉬어가기라도 하듯이 모든 것이 아주 정적입니다.
그 물줄기가 장장 50여리에 걸쳐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데,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합니다.
산세도 험난하지 않고, 마을마저 수줍어하는 처녀처럼 은근하게 자리하고 있지요.

지리산의 물을 모아 흐르는 물줄기로는 주능선 남쪽의 섬진강이 대표적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섬진강 맑은 물과 흰 모래 등이 어울려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은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대로지요.
지리산 주능선 북쪽의 휴천계곡 50리, 곧 엄천의 독특한 풍광과 시정도 지리산을 빛내주는 훌륭한 자산입니다.

500여년 전 이곳을 찾았던 김종직과 김일손 등은 엄천 주변의 자연경관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었지요.
또 당대의 석학 정여창은 "바로 이런 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겠느냐"며 난세에 은둔할 만한 이상향이라고 했었지요.
앞쪽에는 천왕봉과 중봉 하봉, 왕산 등이 늘어서고, 뒤로는 금대산과 법화산 등을 부드럽게 두르고 있는 엄천 주변 일대는 정말 신선과 같은 이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엄천 유역과 강안에 자리잡은 마을들은 나름대로 역사적인 자취와 사연들을 안고 있습니다.
마을 이름도 그냥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니지요.
마을 이름 하나에도 그만한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더군요.
우리가 따뜻한 가슴으로 이들 마을을 지켜보게 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전국의 오지 마을 가운데 하나로 꼽힌 견불동은 신라 시대에 중건한 견불사라는 사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백년동이란 마을 이름은 고려말기 개성 유수로 있던 이억년이 원나라의 간섭으로 정치가 문란해지자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며 찾아온 곳인데, 그이를 따라왔던 이백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하네요.

엄천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큰 마을로 남호리를 들 수 있겠습니다.
동호, 원기, 한남 세 마을을 안고 있습니다.
동호마을은 엄천사가 자리했던 곳으로 지금의 엄천이란 이름을 갖게 해준 원류라고도 하겠네요.
한남마을은 이곳 새우섬에 유배돼 삶을 마감한 한남군(漢南君)의 군호를 따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엄천에도 역사의 격랑과 재앙이 휘몰아치기도 했었지요.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지리산 전투, 빨치산과 군경토벌부대의 처절한 전투가 이곳에서 예외없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그보다 '서주리 대학살'이라고도 불리는 양민학살 사건이 더 슬픈 일입니다.
설날 아침 방곡리 일원을 덮친 군인들이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사건 또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비극으로 남아있습니다.

방곡리, 서주리 등의 비극은 다음 기회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휴천계곡 50리, 엄천을 흘러내리는 지리산 청정계류가 원래의 1급수 맑은 물을 되찾도록 바라는 것이 우선 순위가 되야 하겠네요.
한때는 상류의 지방공단과 축산단지 오폐수가 흘러들어 용류담 등에 녹조가 뒤덮인 일도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연중 계속되는 태풍피해 복구작업으로 흙탕물이 쏟아져 생태계 파괴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거에요.
이곳에서 자라던 다슬기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청군은 엊그제 경호강 등에서 다슬기 치패 33만개를 방류하기까지 했어요.
지리산 자락 1급수 샛강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