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9454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992년 5월31일.
전남 구례군 토지면 단산리, 섬진강변 부락에서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신록으로 온통 파란 물감을 덮어쓰고 있는 듯했습니다.
완만하면서도 길게 이어진 능선길은 온통 철쭉의 화원이었어요.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처럼 생각되기도 했답니다.

왕시루봉의 외국인선교사수양촌, 지도에는 그냥 '외국인 별장촌'이라 표기돼 있었지요. 그 별장촌에 왕년의 '노고단 호랑이' 함태식(咸泰式)님이 은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겨울 그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본다는 것이 이런저런 일로 늦어져 이 날에야 겨우 발걸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함태식님은 1971년 이래 16년 동안 40평짜리 단층 건물인 '노고단대피소'를 지켜왔었지요. 그런데 1988년 1월9일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의 3층짜리 현대식 새 '노고산장'이 문을 열면서 그이는 피아골대피소로 밀려났습니다.
노고단에서 밀려난 아픔을 다스리지 못해 통음을 하고는 하던 그이가 91년 가을이 저물기도 전에 썰렁한 피아골대피소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함태식님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1991년 11월5일, 그이는 뜻밖에도 왕시루봉의 외국인선교사수양촌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수양촌 관리인이 된 것이지요.
왕시루봉에 수양촌이 건립된 다음해인 63년부터 거의 30년 동안 수양촌 관리를 도맡아왔던 전남 승주군 출신의 이강협님, 40대 중년으로 가족과 함께 수양관으로 이주했던 그이는 70대 노령이 되어 혼자 몸으로 바뀌어 하산한 것이에요.
함태식님은 이강협 노인으로부터 수양촌 관리의 바톤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함태식님은 왕시루봉 별장촌(외국인선교사 수양촌)으로 옮긴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는 왕시루봉을 찾는 산꾼들도 극히 드물었지요.
그이는 교회로 쓰는 콘세트 건물 뒤쪽에 있는 방에 '王甑莊(왕증장)'이란 이름을 내걸고 왕시루봉의 새로운 생활을 은밀하게 시작한 것이지요.
조용히 은거(?)한 셈이었어요.

하지만 '노고단 호랑이'로 너무 유명했던 그이가 아니겠습니까.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이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었지요.
그러니까 왕시루봉 수양촌, 곧 '인휴대(印休臺)'에 머물고 있는 그이를 등산객들의 눈이 놓칠 까닭이 없었던 것입니다.

"왕시루봉 별장촌에 함태식님이...!"
인터넷도 몰랐던 때였지만, 입과 입으로 이런 소문이 번져나갔습니다.
그이와 친숙했던 산악인들이 서둘러 왕시루봉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건강하면 그 이상 다행이 없어!"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산악인들이 그이와 박주라도 나누며 산정(山情)을 다지는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고는 했답니다.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우리 일행의 배낭에는 됫병 짜리 '寶海(보해)'소주 여럿이 들어있었지요. 함태식님의 독특한 '무애주 이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산자락에서부터 사들고 올라온 寶海소주가 왕증장에 이르면 어느새 '무애주(無碍酒)'가 된다."
25도의 소주가 왕시루봉에 이르는 산길을 오르는 동안 탈속(脫俗)을 한다는 것이 그이의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세 시간이나 천상의 화원을 따라 올라 이윽고 왕시루봉 바로 아래편, 외국인선교사수양촌에 닿았습니다.
"얼른 와요, 얼른 와!"
왕시루봉의 함태식님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어요. 그이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그이가 피아골대피소 때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이어서 우리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 ?
    부도옹 2004.02.10 23:38
    왕시루봉 외국인 선교사 수양촌에서 은거를 시작한 함태식님의 이야기가 최화수님의 글을 빌어 재미지게 펼쳐지겠네요.
    '낭만시대' 멋진 표현입니다. ^^*
  • ?
    허허바다 2004.02.11 11:10
    몸이 부실하고 욕심에 눈 멀고 현실의 탐닉에 잠시 몰두하던 시절 1990년대 그때 또 다른 우주인양 그곳에선 이렇게 낭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군요...
  • ?
    솔메 2004.02.11 11:59
    '인휴대의 낭만시대'라는 제목과 왕시루봉능선의 철쭉과 연두빛 신록이 펼쳐진 시작글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낭만이라는 낱말 자체도 옹색한 현실생활의 선반위에 올려놓은채 살고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진정한 지리산객들이 구가하던 깊은 낭만의 숨소리를 여산선생님의 붓끝에서 기대합니다.
  • ?
    김현거사 2004.02.12 23:05
    '소주가 지리산을 오르면 無碍酒로 탈속한다'는 그분 함선생님 참 멋있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2 얼룩 번져나는 '섬진강 그림'(1) 8 최화수 2003.10.27 5492
191 얼룩 번져나는 '섬진강 그림'(2) 9 최화수 2003.11.03 5453
190 얼룩 번져나는 '섬진강 그림'(3) 8 최화수 2003.11.10 5907
189 왕시루봉의 '선교 유적지'...(1) 9 최화수 2003.11.25 8816
188 왕시루봉의 '선교 유적지'...(2) 10 최화수 2003.12.12 7003
187 왕시루봉의 '선교 유적지'...(3) 6 최화수 2003.12.28 8768
186 왕시루봉의 '선교 유적지'...(4) 8 최화수 2004.01.09 8793
185 왕시루봉의 '선교 유적지'...(5) 5 최화수 2004.01.20 10526
»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1) 4 최화수 2004.02.10 9454
183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2) 4 최화수 2004.02.15 6863
182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3) 3 최화수 2004.02.26 5826
181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4) 5 최화수 2004.03.07 5820
180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5) 2 최화수 2004.03.17 5699
179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6) 2 최화수 2004.04.09 5747
178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7) 2 최화수 2004.04.16 5186
177 인휴대(印休臺)의 낭만시대(8) 4 최화수 2004.05.03 5677
176 잔치잔치, 피아골의 대축제(1) 3 최화수 2004.05.16 5725
175 잔치잔치, 피아골의 대축제(2) 4 최화수 2004.05.19 5185
174 잔치잔치, 피아골의 대축제(3) 4 최화수 2004.05.23 5625
173 잔치잔치, 피아골의 대축제(4) 5 최화수 2004.06.02 561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 Next
/ 1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