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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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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도에는 왕등재를 두 곳으로 표기하고 있다. 동왕등재, 서왕등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소막골 위의 동왕등재는 근래 들어 편의상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 같고, 예부터 불러오던 왕등재는 외곡마을과 수철리를 잇는 서왕등재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주장이다.
어쨌든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왕등재'란 그 이름이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정령치', '황령치'란 이름이 마한 피난도성 시절 정장군과 황장군의 역할에서 유래했듯이, 왕등재 곧 왕등치(王登峙)는 글자 그대로 왕이 올랐던 고개였을까?
왕등재에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위치한 북쪽의 산 이름은 왕산(王山)이다. 그 왕산 기슭에는 국내 유일의 피라미드식 돌무덤인 '전 구형(傳 仇衡)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구형왕은 가락국 마지막 임금으로 신라에 나라를 양도해주고 지리산 기슭으로 숨어들었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 때문에 '양왕(讓王)'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는 등의 이설(異說)도 있는 만큼 왕산 돌무덤의 주인공 여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다만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미 성역화 작업도 해놓았다.

어쨌든 수수께끼의 '전 구형왕릉'과 왕산, 왕등재가 거의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다 '왕등재'라고 한 이름이 주목될 만하다.
왕등재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인물은 따로 있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유평계곡 삼거리마을 이상진 이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이는 왕등재 바로 남쪽 외곡리에서 25년을 살아온 ‘왕등재의 사전(辭典’)과도 같았다.

"왕등재에 왕이 올랐다는 얘기는 결코 전설이 아니다. 견고한 토성을 2중으로 쌓았고, 성 한가운데 궁을 지었던 궁터가 남아 있다. 남문 북문 서문도 있고, 궁터에는 기왓장이 남아 있다. 이 중요한 역사의 유적지가 한번도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이의 말이다. 왕등재에 토성과 궁터, 세 성문이 남아 있다니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얘기였다.

당시 필자는 크게 흥분하여 그를 따라 왕등재 일원을 샅샅이 답사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2권에 실려 있다.
그이는 왕등재 뿐만 아니라 유평계곡 전체가 가락국 마지막 왕의 강력한 요새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깃대봉', '망생이봉'(말을 사육한 곳), '도장골'(곡식을 저장한 곳) 등의 주변 지명들을 들이대기도 했다.

사실 왕등재는 여러 가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그 아랫마을 외곡리가 절묘한 천연요새의 지형을 가진 것부터 그렇다. 유평계곡 삼거리마을에서 보면 꽉 막혀 있는데, 병 주둥이 같은 좁은 계곡을 따라들면 놀랄 만큼 넓은 분지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드넓은 목장과 많은 곡식을 거두는 논밭들이 마을과 함께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발 1000m 가까운 왕등재 자체의 신비로움이다.
왕등재는 '물의 고개'로 불릴 만큼 물의 천지이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 일부는 남쪽의 외곡리로, 일부는 북쪽의 수철리 방향으로 흘러내린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펑펑 솟아나 고개 전체가 늪지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다. '산상의 늪지대'에 서식하는 식물들도 아주 다양하다.

"해발 1000m의 고개 위에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져 있다면 누가 믿겠나? 수백 명이 경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에 수천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스탠드까지 설치가 되어 있다. 물론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천연적으로 조성됐다."
이상진 이장의 조크대로 헬기장 남쪽으로 너비 200m, 길이 수백 m의 넓은 운동장 같은 평평한 평지가 열려 있었다.

왕등재를 남쪽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험준한 비탈로, 오르는 일마저도 결코 쉽지 않게 생각된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운동장처럼 드넓은 평지가 열려 있고, 더구나 수초들이 자라는 늪지대가 자리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또 왕등재란 이름과도 관계가 있는 듯한 토성과 궁터도 남아 있어 학술적 규명작업을 하는 것이 시급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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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7.10.15 09:26
    지리산과 가까운 대학에서 좀더깊고 심도있게 연구하고
    학술적인 체계가 아쉽군요,
    지리99에서 가객님과 꼭대님께서 많은 탐사와 고증후
    좋은자료를 남기고 있어서 다행 이드군요,
    좋은공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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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규 2007.10.15 14:28
    왕산에 있는 돌 흔적을 보고 사람들마다 아직까지도 설왕설래를 하는것 같습니다. 가야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를 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네요. 왕산에 왕등재, 함양 마천의 등구에 빈대궐터, 역시 추성 주변의 국골, 두지터(창고터)등의 이름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만 지리산 주변의 역사는 기록화 되기보다는 구전으로 지명으로 전설화되어 역사의 진실이 거의 숨겨져 버렸습니다.

    왕산의 구형왕릉 관련 네이버 자료를 찾아보니 자료가 있어서 올려봅니다.
    최근(2007년 3월)에 부산 외대 권덕영 교수의 논문중 전 구형왕릉은 능이 아니고 불탑이라고 주장을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 王山寺記(왕산사기)[1]

    僧 坦瑛(승 탄영)[2]

    [1] 왕산사기(王山寺記)=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서쪽 20리, 곧 금서면 화계리 왕산 아래 있는 구형왕을 수호하던 왕산사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

    [2]. 중 탄영(僧 坦瑛)=효종원년(청나라 순치7년:1650)에 왕산사기를 지은 승려로서, 그후 숙종13년(청나라 강희26년:1687) 방호산인 형곡당 복한(方壺山人 荊谷堂 復還)이 수정암기(水晶菴記:왕산사의 개칭)을 지었을 때는 그의 문인(門人)으로써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山陽縣之西隅, 方丈山東麓, 有山曰王山, 有寺曰王寺, 上有王臺[3], 下有王陵, 故曰王山, 知守護陵墓, 故王寺, 寺本王水晶宮也, 陵乃駕洛國第十葉仇衡王所예之玄宮也.

    산양현(山淸)의 서편 모퉁이자, 방장산(智異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으니 왕산(王山)이라 하고, 절이 있으니 왕산사(王山寺)라고 한다. 산상에는 왕대(王臺)[3]가 있고, 산하에는 왕능(王陵)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왕능 수호를 맡으므로 왕산사라하는데, 절은 본래 왕의 수정궁(水晶宮)이었고, 능은 이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께서 묻힌 무덤이었다.
    [3] 왕대(王臺)=구형왕능도(仇衡王凌圖)를 보건데,왕대의 위치는 정상에 표시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31 山陰縣 佛宇 『王臺菴 在王山』

    蕭梁[4]大通八年[5], 新羅眞興王, 來攻于駕洛, 駕洛仇衡王, 不忍以土地傷民, 遜國于新羅, 降爲金官郡都督[6], 後井與其食邑而舍之, 來居于此, 因卒而葬之, 累石爲邱, 輿地[7]王山誌曰 山中累石爲丘, 四面有層級, 俗稱王陵云者, 是也.
    소양(蕭梁) 중대통(中大通) 4년(532)에 신라 법흥왕이 가락을 쳐오므로, 가락 구형왕은 국토로 말미암아 백성을 상하게 함은 참아 볼 수 없다 하시고, 나라를 신라에 손양(遜讓)하여, 금관군 도독(金官郡都督)으로 강등되셨다. 뒤에 그 식읍(食邑)을 모두 주어버리고, 여기에 와서 거처하시다가 세상을 여의시므로 인하여, 이어 장례하고 누석(累石)을 쌓아서 구릉(邱陵)을 만들었다. 여지승람 왕산지(王山誌)에 말하기를 『산중에 누석으로 구릉을 만들고, 4면(四面)에 층계가 있으니, 세속에 왕능이라 일컫는다』고 함은 이 곳이다.
    [4] 소양(蕭梁)= 중국 양 무제(梁武帝)의 성은 소(蕭)씨 이름은 연(衍), 국호는 양(梁)인데 『소씨의 양나라』라는 뜻이나 역사문헌에는 양이라 했을 뿐이다.
    [5] 대통8년(大通八年)=八년은 六년의 잘못이며,대통(大通)은 二년 뿐인즉, 중대통(中大通)四年(532)이 옳은 것이다. 이러한 관례는 여러 구보에서도 흔히 보게된다.
    [6] 금관군도독(金官郡都督)=삼국사기 권四 신라본기 법흥왕 十九년(532)조에는 『상등의 직위를 수여하다』(授位上等)고 하였음.
    [7] 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말한 것으로, 권31 山陰懸 山川 조에 『王山, 在懸西十里, 山中累石爲丘, 俗稱王陵云』이라 하였음.

    其後 王太子[8]〔=王孫〕 大角干舒玄, 捨宮爲寺, 王孫[9]〔=王曾孫〕 大將軍興武王庾信, 追封首露王廟於王臺, 爰立仇衡王祠於玆寺, 所以薦祖父冥路, 奉香火之願刹[10]也. 因侍陵七載, 築臺習射, 故今寺右, 有金將軍射臺云,

    그 후 왕손 각간(角干) 서현(舒玄)이 수정궁을 버리고, 왕산사를 삼았으며, 왕증손 대장군 흥무왕이, 수로왕묘(首露王廟)를 왕대에 추봉하고, 이내 구형왕사(仇衡王祠)를 이 절에 건립한 연유로써, 조부의 명로(冥路)를 빌고 향화(香火)를 받들던 원찰(願刹)이었다. 7년동안 능을 모시면서 축대를 쌓아 활쏘기 연습을 하였으므로 지금 절의 오른편에 김 장군 사대(金將軍射臺)가 있었다고 한다.

    [8] 왕태자(王太子)=앙손(王孫)의 오기임)
    [9] 왕손(王孫)=왕증손(王曾孫)을 오기한 것임.『仇衡王 子는 武力, 孫은 舒玄, 曾孫은 庾信』
    [10] 원찰(願刹)=소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사찰(寺刹)

    新羅三十法敏, 有制曰 朕乃仇衡王之外孫, 遣中使, 率匠石, 儼潔其祠祀之儀, 重新자寺, 特封近處三十頃田, 以奉香火之資,
    신라 30대왕 법민왕(文武王)은 조서를 내려 『짐은 구형왕의 외손이다』하고, 사자를 보내어 석공(石工)을 거느리고, 사당의 제의(祭儀)를 정결하게 하고, 절을 중수하고, 근처 밭 30경(頃)을 바쳐서, 향화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其後, 王陵久荒, 禪宮亦廢, 物不恒悴. 得時以榮, 道不終否, 得人以興, 故高麗神宗四年, 下旨州郡, 重修王陵, 兼葺王寺, 及我 宣廟黑龍之歲[11]. 靑衣之亂, 玆山寺墓, 沒入夷蕩, 金田[12]巳灰, 垠악[13]猶存, 但聞嶺猿[14]哀嘯. 谷鳥悲鳴而己,
    그 후 능은 오래 거칠어지고, 절도 역시 퇴폐하였다. 물건은 항상 쇠퇴하지를 않으니 때를 얻으면 번영하고, 도(道)는 끝내 비색(丕塞)하지를 않으니, 사람을 기다려 흥왕한다. 그러므로 고려 신종4년(1202)에 교지(敎旨)를 고을로 내려서, 능을 중수하고 겸하여 절을 고쳤었다. 우리 선조(宣祖) 임진년(1592) 왜란에 이르러, 이 왕산의 절과 능묘가 난리에 침몰되어 들어갔다. 절은 이미 소실되었으나, 절터는 아직 남아 있으므로 다만 산짐승 애타게 울고, 새짐승 슬프게 울 뿐이었다.
    [11] 흑룡지세(黑龍之歲)=임진(壬辰)년.
    [12] 금전(金田)=금지(金池)라 하기도 하는데 사찰의 뜻임,
    [13] 은악(垠악)=비탈진 경계로서, 여기에는 절터를 의미한 것임.
    [14] 영원(嶺猿)=산에 있는 원숭이를 말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으므로, 산짐승이라 하였음.
    順治七年[15], 僧徒又爲重建玆寺, 移埋廟主於他處, 換置佛軀於王廟, 旣訖, 沙門法永, 袖其寺墓舊蹟, 淸記于余, 不敢辭詞薄,
    순치7년(1650)에 승도들이 또 절을 중건하여, 위패를 다른 곳에 옮겨 묻고, 부처를 왕묘(王廟)에 바꾸어 두었다. 공사를 이미 마치고, 중 법영(法泳)이 그 절과 능의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감히 단문이라는 연유 만으로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15] 순치7년(順治七年)=청나라 세조의 연호로서, 조선 효종원년(1650)에 해당함.
    謹按本記, 山寺之以王名者, 乃首露王建廟之地, 仇衡王遜居之址, 興武王所창之寺, 新羅文武王所封之山, 高麗神宗大王重建之處, 上有王臺, 下有王陵, 中有王之畵像. 遺衣及所用弓劍之故也.
    삼가 본기(本紀)를 살피건대 산사(山寺)를 왕으로 이름한 것은, 이에 수로왕묘(首露王廟)를 건립한 지방이요, 구형왕의 은거하신 옛터이요, 흥무왕의 창건한 절이요, 신라문무왕의 추봉한 산이요, 고려 신종 대왕의 증건한 곳이며, 산상에는 왕대가 있고, 산하에는 왕능이 있고, 중간에는 왕의 화상. 유의(遺衣) 및 사용하시던 활과 칼이 있는 연고이었다.
    古者, 駕洛諸王遺蹟, 羅麗所賜之物甚多, 若王陵本蹟曰, 婆娑墓[16]中. 舍衛[17]之白玉猶有, 祗桓寺裡. 須達[18]之黃金尙存, 斯一句己知矣, 今則皆失於兵火, 只有二幅畵像[19]. 一件天翼, 두弓殘劍客一, 是亦子孫散四, 不能守護, 故命藏於木函中, 以待百世之後也.
    옛날 가락국 여러 왕의 유적과 신라 고려에서 보내준 보물이 많았음은 왕능본적(王陵本蹟)에 말한 것처럼 『파사묘(婆娑匿王墓) 중에는 사위성(舍衛城)의 백옥이 오히려 있고 지환정사(祗환精舍) 안에는 수달(印度富者)의 황금이 아직 있다』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로 이미 짐작할 수 있거니와, 지금은 다 난리에 잃어버렸고, 다만 두 폭의 화상과 한 벌의 왕의(王衣)와 좀먹은 활과 부서진 칼이 각각 하나씩 있으나, 이것도 또한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호할 수 없으므로, 나무궤에 간직하여 백세의 후일을 기다리게 하는 터이다.
    [16] 파사묘(波娑墓)=석가여래 때의 인도 파사익왕 무덤.
    [17] 사위(舍衛), 지환사(祗桓寺)=지금 인도의 사혜마헤트에 있었다. 일명 지원정사(祗園精舍)라고도 함. 사혜트는 지원정사, 마혜트는 사위성(舍衛城)의 뜻임. 옛날 『지다』 태자의 땅을 사들인 급고독(給孤獨)이라는 장자(長子)가 정사(精舍:절)를 세워 석가에게 바쳤다 한다. 그리고 이정사의 북쪽에, 한층 높게 꾸민 『가닥디』라는 유적이 있는데, 석가가 24회의 안거(安居)를 지낸 곳이라 하여 가장 신성시한다. 이 유적 근처에는 석가가 지원정사를 떠났을 때, 스승을 생각하기 위하여, 그 제자인 아난(阿難)이 심었다는 보리수(菩提樹)가 높히 솟아 있었다고 하는데 이 지원정사의 북쪽 5리쯤에 사위성의 옛터가 있다고 이른다.
    [18] 수달(須達)=혹은 급고독(給孤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지원정사를 세워서 석가에게 받혔던 엣날 인도의 큰 부호가 있었음.

    [19] 이폭 화상(二幅畵像)= 지금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덕양전의 서쪽 영정각에 봉안된 『가락국 구형왕』내외분의 화상임.

    [洪博士儀泳 王山尋陵記]

    [홍 의영 박사가 지은 왕산 심능기]
    往年戊午, 嶺南大旱 自春. 至夏季, 竟無點滴, 邑儒閔景元, 南士之望也, 與朋주潔齋전羞, 爲文求雨于陵之下, 未崇朝而大雨驟至, 閔滯雨不能歸, 館於王山寺,
    작년 무오(1798)에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봄부터 늦여름까지 끝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읍유(山淸邑儒) 민 경원(閔景元)은 남쪽에서 명망 있는 선비였다. (6월4일에) 친구들과 더불어 정결히 재계하고 제물을 차례 놓고 글을 지어 능 앞에서 비를 빌었다. 새벽녘에 큰비가 쏟아지므로, 민은 비에 막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왕산사에서 체류하였다.

    與寺僧, 說其靈異, 詢其古蹟, 僧曰古蹟誠多, 秘不敢發, 强以後, 出古木函, 경휼甚嚴, 遂排而啓之, 有沙門坦瑛山寺記一卷, 瑛乃百年前名釋(中略)

    승려들과 함께 신비함을 말하면서 『고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말하기를 『고적은 실로 많으나, 비밀이라서 발설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강력히 요구한 후에 나무궤를 내어놓았다. 자물쇠와 장식품이 매우 엄밀하므로 마침내 이를 비틀어 열었다. 중 탄영(坦瑛)이 지은 왕산사기(王山寺記)가 있었는데, 탄영은 곧 백년전의 명승(名僧)이었다.(중략)

    當時奇偉之蹟, 受後昆無窮之饗也, 鳴呼異哉, 諸金遂以實狀告之, 道伯及本졸, 莫不欽聳稱奇, 禁其芻牧, 新其塋域, 去來文簿[20], 鄭重讚揚, 皆不可記焉.
    당시 기이하고 거룩한 고적은 후손들의 무궁한 흠향을 받게 되었다. 아! 신비로운 일이다. 여러 김씨들이 마침내 실상을 보고하니, 관찰사 및 산청현감은 귀를 높이면서 신기하다고 일컬었다. 나무하기와 소를 금하고, 영역(塋域)을 새롭게 하도록 하였으니, 왕복문서의 정중한 찬양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20] 거래 문부(去來文簿)=정조22년(1798)에 구형왕능을 발견한 이후로, 관계요로에 왕복했던 문서를 말한 것으로, 이는 삼왕삼왕사적고(駕洛三王事蹟考)에 전부 수록되었다.

    [駕洛三王事蹟考 券六 王系]
    [가락삼왕사적고 권六 왕세계]

    十世仇衡王… 正廟戊午, 因祈雨, 始顯靈, 自營邑. 轉移京司, 當저癸亥, 八路子孫, 改築荒園, 創建陵寢. 講堂. 廊舍. 門樓·
    10대 구형왕… 정조 무오(1798)에 기우제로 말미암아 비로소 신령스러운 자취가 나타남으로, 본읍과 관찰부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금상(今上:純祖) 계해년(1803)에 팔도(八道)의 자손이, 황폐한 능원을 고쳐 쌓았고, 능침과 재실과 문루(門樓)를 창건하였다.

    ( 출처 : http://www.kimheakim.com.ne.kr/index.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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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7.10.22 17:52
    지리산 그 신비의 산정 해발 1000m 에 공설운동장, 늪지대가 있음에 많은 가야사 신라사의 역사 흔적이 엿보임도 다행스럽습니다 .깊은 고찰을 하는 학술적 답사가 기대됩니다. 여산선생님의 본문에 늘 깊은 古史를 첨부해 주시는 김용규선생님의 열성과 관심에도 , 위의 참 훌륭한 분들에게 존경심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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