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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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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문(門)이 있다고 했습니다.
문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고 했지요. 오두막의 싸립문도 그 앞에서 헛기침을 하고 대답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지리산의 문은 어떻게 들어서야 할까요?
저 고매한 남명(南冥)선생은 갓끈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갓을 쓰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갓 대신에 등산모자를 쓰는 오늘입니다. 등산모자에 탁영대(濯纓臺)란 어울릴 수가 없겠지요.

지리산 동부 관문에 풍광이 수려한 유평계곡이 있습니다. 노송과 암반과 옥류에 혹한 한 유명인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탁족처(濯足處)'라고 말했지요.
발을 물에 담그고 있는 고고한 탁족의 경지가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은 갓끈 대신 발을 씻어도 상관이 없는 곳일까요?
이 유평계곡에는 세신탕(洗身湯), 세심탕(洗心湯)이란 두 소(沼)가 나란히 자리합니다. 세신탕은 그렇지만, 세심탕이란 또 무엇일까요?

세신탕은 아래쪽, 세심탕은 그 위쪽에 있답니다.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세신탕에서 먼저 몸을 씻고, 다시 세심탕에서 마음을 씻은 뒤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씻는 세심탕! 계곡에서 몸이야 씻겠지만, 마음은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요? 세심탕이 주목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명산 계곡마다 선녀탕, 옥녀탕 등 좋은 이름들이 수두룩하지만, 세심탕은 지리산에만 존재하는 듯합니다.

세심(洗心)이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지요. 사심(邪心)을 버리고 올바른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목욕재계(沐浴齋戒)란 말에 세신, 세심의 뜻이 함께 포함돼 있지요.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욕을 하고, 육식을 삼가며, 몸가짐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몸을 씻고 금욕과 절제를 하면 되지요.
그런데 지리산에선 어째서 몸 씻는 곳, 마음 씻는 곳이 따로 있을까요?

유평계곡의 맑은 물은 덕산(德山)의 덕천강으로 흘러듭니다. 바로 그곳에 세심정(洗心亭)이 아주 단순질박한 모습으로 서 있지요.
남명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등 후학들이 157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세울 때 그 앞에 함께 세운 정자입니다.
남명의 제자 하항(河沆)이 주역에 나오는 '聖人洗心(성인세심,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이란 말을 취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더군요.

남명 선생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이곳 지리산 자락에서 학문과 사상의 불꽃을 지폈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곧 '지리산 정신'의 큰 줄기를 이루지요.
산천재, 별묘, 묘소, 종가와 생가 등 그의 많은 유적들 가운데 세심정 또한 주목됩니다. 남명의 가르침, 곧 지리산 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이 세심정은 그 이름 만으로도 지리산 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는 없는 세심탕이 유평계곡에 존재하는 까닭도 이 세심정의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이는 세신탕, 세심탕이 심메마니로부터 유래됐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입산 1주일 전부터 매일 목욕을 하고, 부부관계를 삼가며, 나돌아다니지 않는 등 나름대로의 습속이 따로 있지요.
또 세심이란 아주 마음을 비우는 일이니, "심봤다"의 목적이 앞서는 심메마니와는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는지요.

남명 선생은 후학을 가르친 산천재(山天齋)의 벽과 창문 사이에 '敬(경)'과 '義(의)' 두 글자를 써놓았답니다.
경으로 내적 수양을, 의로 외적 실천을 하라는 것이지요. 안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밖을 반듯하게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남명의 지리산 정신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몸을 씻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까지 씻고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아라는 '경'과 '의'가 세심탕과 세심정에 담겨 있겠지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습니다. 엊그제 입산통제가 풀리기가 바쁘게 단단하게 무장한 산꾼들이 적설기 산행에 뛰어들고 있더군요.
그들에게 유평계곡 세신탕, 세심탕 얘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겠지요. 그런 구닥다리 얘기는 씨도 안 먹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덕산의 세심정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답니다.
유평계곡의 세신탕, 세심탕도 여전히 그곳에 있음을 알고는 있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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