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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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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산의 해'입니다.
키르키스의 아카예프 대통령의 제의로 '산의 해'로 제정한 취지는 급증하는 산림훼손을 막아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고,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산악 거주자의 복지를 증진하는 것 등이지요.
주관단체인 유엔식량농업기구 쟈크 두프 사무총장이 유엔총회에서 발표한 '산의 해 선언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산은 문화적 다양성이 가득찬 곳으로...그 속에서 우리는 숭고한 정신을 찾는다]고 한 것이지요.

'산의 해'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겠지요.
생태계 보전 등 화급한 일들이 있지만, 우리 산악 애호가들은 산의 숭고한 정신이라도 제대로 깨우쳤으면 합니다.
산은 문화적 다양성이 가득하며 거기에서 산의 숭고한 정신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산이 지닌 문화적 다양성이 존경되고, 그 다양성이 수목처럼 청정하게 보존될 때 산의 정신도 읽게 되겠지요.
'산의 정신'이라니까 천왕봉에 고착돼 있던 '사냥개 우리'와 같던 쇠창살의 괴상한 구조물 생각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1989년 8월 천왕봉의 성모사터(聖母祠址)를 찾았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웬 '사냥개 우리'와 같은 철구조물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방을 쇠창살로 견고하게 엮어놓은 높이 1.5미터 가량의 철구조물이 완강하게 시멘트로 고착돼 있고, 앞쪽의 여닫는 문에는 쇠통까지 채워져 있었어요.
하지만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천왕봉에 '쇠창살 개집'이라니 이게 도대체 웬 변고입니까?
거기엔 그럴만한 기막힌 사연이 있었던 것이에요.

1000여년 동안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석상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중산리 중심골의 천왕사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천왕사 혜범 스님은 그 3년 앞인 86년 1월12일 성모석상의 머리 부분을 진주 비봉산 과수원에서, 5월9일 몸통 부분을 천왕봉 남쪽 500미터 통신골에서 찾아냈다는 군요.
그이는 두 동강 난 성모석상을 철물점에서 봉합하여 천왕사에 모셨습니다.
그로부터 현지 두류산악회 회원들과 혜범 스님 사이에 성모석상을 사이에 두고 밀고당기는 힘겨루기가 벌여졌던 거지요.

두류산악회는 성모석상을 원래의 자리인 천왕봉에 다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혜범 스님은 또 수난을 당할 천왕봉으로 결코 보낼 수 없다고 버틴 것입니다.
혜범 스님은 성모석상이 천왕봉에 오르면 또다시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쳐지게 될 것이 뻔하다고 했답니다.
두류산악회는 그런 '해꼬지'를 막을 수 있는 쇠창살 구조물을 천왕봉에 세운 것입니다. 철망 안에 모시면 안전이 보장된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게 개집이 아니고 뭡니까? 사당을 지어도 부족할 텐데, 쇠창살 개집에 '천왕할매'를 모신다니 말이나 됩니까!"
혜범 스님이 펄쩍 뛰었지요.
이렇게 하여 성모석상의 천왕봉 복귀운동이 법정으로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좌절이 되고 말았답니다.
천왕사의 혜범스님이 성모석상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수수께끼입니다. 스님은 '천왕할매의 현몽'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석상의 머리 부분이 멀리 떨어진 진주 과수원에 버려진 것도 그렇습니다.
성모상이 천왕봉에서 강제하산되어 중산리에 모셔진 것은 사람들의 '해꼬지'에 따른 셈입니다.

고려 우왕 6년(1380) 황산전투에서 패한 아지발도의 왜구들이 지리산으로 패퇴하면서 성모석상에게 칼질을 한 것이 수난의 시작입니다.
조선 선조 때는 천연(天然)이란 스님이 무당의 무리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한다며 성모사를 부수고 석상을 밖으로 내동댕이쳤지요.
1945년 11월에는 삼장면 내원골 외딴집에 살던 한 농부에 의해 보쌈을 당하는 수모도 겪었답니다.

성모석상이 천왕봉에서 강제하산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1972년 5월에 벌어졌어요.
모 종교단체 신도들이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갔는데, 성모상도 동시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행방이 묘연하던 성모상을 1986년 혜범 스님이 발견하여 천왕사에 모시게 된 것이지요.
그 날 이후 다시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성모석상은 천왕봉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성모사에 콘크리트로 고착돼 있답니다.
그 사이 성모사터 쇠창살 구조물은 철거됐고요.

산에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거기에서 숭고한 정신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들이 천여년 동안 한결같이 경배하고 소망을 기원했던 성모석상이 지금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다양성이 존중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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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매기 2002.01.09 09:42
    선생님 지도 부산하고도 사하구 신평삽니다. 김해사시는 山者의 연락으로 알게되었습니다. 전화 한 번 드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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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화수 2002.01.09 10:05
    '갈매기'님, 반갑습니다. 님의 글은 여러 곳에서 익히 보고 있답니다. 곧 '山者'님 등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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