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2)

by 최화수 posted May 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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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등산구의 우천 허만수 추모비가 주는 여운이 필자에게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는 듯했어요.
'칠선계곡에서 지리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을 것'이라고 했으니...!
우천 허만수님은 칠선계곡에서 증발한 것이 아니라, 태고의 신비와 하나로 통하여 영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했답니다.

지리산에서 30년을 야생(野生)한 산사람이 지리산의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칠선계곡의 적요'를 꼽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이는 칠선계곡의 원시 자연세계에 동화하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이는 평소 가까운 이들에게 그런 말을 넌지시 비치고는 했다니까요.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필자가 첫번째 칠선계곡을 찾았을 때는 계곡 주변에 '그럴듯한 동굴'이 없을까 하고 시종 좌우를 살펴보고는 했었답니다.
우천의 행방에 대해 집착을 보이자 가까운 주위 산악인들이 이렇게 말하고는 했지요.
"우천은 자연 동굴 같은 곳을 자신의 유택으로 미리 마련해놓았을 법하다."
칠선계곡 어디엔가 자신이 편안하게 영면할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실제 우천 허만수님은 생전에 가까운 이들에게 아무도 모르게 증발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었다네요.
자신이 사라지고 없을 때는 찾지를 말라고 했답니다.
칠선계곡 어디에선가 자연에 동화돼 있을 것이라고요.
사후 자신의 시신을 거두는 것마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고 하여 칠선계곡의 오묘한 자연세계를 겉모습이나 제대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깊은 자연의 속살은 아예 필자의 눈에는 비치지도 않겠지요.
허만수님이 은신했을 법한 자연 동굴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겠지요.
산길을 따라 칠선계곡을 다 내려갔지만, 동굴과 같은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답니다.

'지리산 산신령'으로까지 불린 우천 허만수님은 누구인가?
그이를 기리는 추모비문은 '지리산 산신령'의 남다른 면모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허만수 추모비' 비문은 1916년생인 그이가 '40여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라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이는 50년대 후반, 빨치산이 평정된 직후에 세석고원으로 올라가 토담집을 마련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이는 지리산에 들기에 앞서 의령 자굴산 토굴에서 2년여를 보냈다고 하지요.

1961년 광주 조선대학교 약학과 1학년 학생 13명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지리산 세석고원에 올랐다네요.
안학수 지도교수 인솔로 지리산의 약용식물 채집과 조사에 나선 것이었답니다.
그들은 우천 허만수님의 초막에서 잠을 자게 되었답니다.
그들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노금모님이 당시 세석고원의 우천 초막 사진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어요.
1989년, 필자가 지리산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던 <지리산 365일>에 우천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