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역사'도 복원해야 한다(1)

by 최화수 posted May 2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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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몰려왔는지도 모르게 운무가 파도처럼 밀려와 산야와 계곡을 메우고, 수려한 노고단 중턱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면, 홀연히 운해만리(雲海萬里) 구름바다를 이루어 높은 봉은 점점이 섬이 되어 완연히 다도해로 변한다.
이 변화무쌍한 자연조화의 신기로운 경관은 오직 숙연한 감동과 외경감(畏敬感)을 안겨준다.'
필자의 고교 선배이자 한때의 직장 선배였던 이종길님이 '지리영봉(智異靈峰)'이란 저서에 쓴 글입니다.

노고단(老姑壇), 그렇습니다, 운해만리의 자연조화가 숙연한 감동과 외경감을 안겨주고도 남지요.
까마득한 옛날 신라 때부터 이 높은 곳에 남악사(南岳祠)란 신단을 나라에서 차렸었답니다.
그래서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을 거에요.

해발 1506미터의 노고단, 지리산 주능선 서쪽 영봉입니다.
노고단의 옛 이름은 길상봉(吉祥峰)이요,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다는 선도성모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가리키지요.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모시는 '신단'(神壇)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노고단이란 이름이 생겨났거던요.

노고단은 수십만평의 광활한 고원분지를 안고 있습니다.
그 주변으로 종석대 관음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이 자리하는데, 예부터 명승지로 꼽혀온 곳들이지요.
무엇보다 화랑도의 심신수련 도장으로 활용이 됐던 곳입니다.
고원 일대는 봄철의 진달래와 철쭉, 여름철의 원추리 황금 군락 등으로 유명하고...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지난 1920년대에는 이곳에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52 동이 들어섰지요. 서양선교사들이 여름철의 한국의 수인성 풍토병을 이겨내기 위해 세운 시설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설은 1948년 여순병란 사건 여파로 그만 잿더미가 되고 말았어요. 이른바 '지리산 빨치산'들에 의한 최초의 희생물이 됐던 것이지요.

1988년,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서울에서 하계올림픽이 열린 해이기도 하지요.
그 해 1월9일, 이 노고단에서 우리 등산 역사상 아주 기념비적이라고 할만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기존의 40평 단층 슬라브 건물인 '노고단 산장'을 폐쇄하고, 바로 그 옆에 현대식 3층 건물인 새 '노고산장'의 문을 열게 된 것이지요.

1987년 5월에 착공하여 3억1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완공한 새 '노고산장'의 위용은 당시로선 정말 혁명적이라고 할 만했어요.
그 때까지는 큰 대피소도 40평 규모가 고작이었는데, 새 산장은 건평 115평의 본관 밖에도 취사장 화장실 등의 부속 시설물과 5000여평의 방대한 야영장을 갖추고 있었어요.
본관에는 '반야봉', '노고단', '종석대'라고 이름붙인 200명 수용의 대형 객실 3개와 샤워실 매점 직원용식당 관리사무실 등을 갖추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새 노고산장은 우리나라 등산 역사상 아주 획기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이른바 '무장비 등산시대'를 열게 된 것이지요.
이 산장은 텐트와 취사도구, 침구 등을 대량 구비하여 아무런 장비도 휴대하지 않고 오른 사람들도 산상야영을 즐길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화엄사에서 무거운 장비를 메고 노고단까지 오르던 것과 견주면 획기적인 변화였어요.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 곧 성삼재 종단도로의 개통이었어요.
천은사~달궁을 연결하는 이 도로는 1967년 화개재 남쪽 연동골 마을에 간첩이 출현한 것을 계기로 급히 만든 군사작전도로였는데, 87년 관광산업도로로 확포장 공사를 완공한 것이지요.
이 도로 때문에 노고단은 '지리 영봉'에서 '산책 코스'로 전락합니다.
산행보다 관광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 어떻게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요?
너무너무 많이 달라졌지요.
...요즘은 중학생을 포함한 각급학교 학생들이 관광버스로 성삼재까지 올라 단체 관광을 하더군요.
그런데 노고단에는 자연생태계는 복원했는데, 학생들은 노고단의 자연은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노고단의 문화와 역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언제부터인가 그냥 내팽개쳐둔 채 그대로이더군요.
아니, 옛 선조의 숨결이 담긴 역사와 문화, 민속, 그리고 지리산의 등산사까지도 마치 빗물에 휩쓸려간 황토처럼 떼밀려가고 보이지 않습니다.
노고단의 자연생태계는 복원하면서 왜 역사와 문화의 복원은 하지 않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