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온몸 내던진 이화중선(4)

by 최화수 posted May 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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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여류명창인 진채선(陳彩仙) 이래 손꼽히는 여류명창으로 당대의 인기를 누린 이화중선.
그녀는 유성기 음반 발매가 가장 많은 명창으로 일제시대 여류명창들이 판소리판 중심으로 나오게 되는 선구자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에 버금가는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은 판소리의 대명창 김소희를 배태시키는 소리이기도 했답니다.
또 가야금병창의 대가 박귀희도 어린 나이에 이화중선의 눈에 띄어 그녀의 손에 이끌려 첫 데뷔 무대를 갖게 되었지요.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했던 전설적인 명창 이화중선.
그녀가 걸어온 수수께끼와 같은 삶은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이화중선은 소리를 배우기 위해 박씨가문에서 뛰쳐나왔다고 했습니다.
첫 스승은 소리를 잘했다는 무당이란 설도 있어요.

이화중선은 이어 남원 최고 명창이던 장득주에게서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웠는데, 이 때 무당이 가로막자 그녀는 장득주의 동생인 혁주의 아내가 되기를 자청해 뜻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장득주와 작별한 뒤에는 서울로 옮겨와서 권번(券番)에 기적(妓籍)을 두고 송만갑, 이동백 등 당대 판소리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와는 좀 다른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이화중선의 두번째 남편은 장득주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녀는 순창에서 남편으로부터 토막소리를 배운 다음 도망쳐 나와 당시 남원에 살던 동생 이중선(1902년생)과 함께 전북 남원군 덕과면 금암리(현재는 전북 임실군 오수면 금암리 2구)에 기거하고, 1925년부터 가야금병창 명인 오태석과 동거에 들어가 약 5년 동안 지냈다는 군요.

당시 금암리에는 기생촌 비슷한 골목이 있었는데, 이화중선의 집은 경주김씨들이 모여사는 초두에 있었다네요.
그곳에 자주 드나들던 명창이 동편제의 대가 김정문 등을 비롯하여 가야금 산조의 명인 김종기 등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이화중선은 김정문의 소리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이화중선은 오태석으로부터 소리와 가야금 등을 배우면서 동거에 들어갔다는 것이에요.
동생 이중선 역시 김정문과 오태석, 그리고 언니 이화중선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현재에도 금암리 뒷산에는 이중선 등이 소리공부를 한 토굴이 있다는 군요.

1930년, 오수의 3대 갑부 중 한 사람이던 이재삼이 이화중선의 머리를 올려주면서 금암리를 떠나와 오수리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됐어요.
이중선은 전주 부안 쪽으로 옮겨갔답니다.
부안에는 조선시대 명기 이매창의 묘가 있는데, 그 묘지 옆에 이중선의 묘소가 자리합니다. 이중선은 1936년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이화중선은 송만갑, 이동백의 지도를 받은 뒤 김초향과 함께 당시 여류 창악계의 쌍벽을 이루었어요.
그녀는 1935년에 조직된 대동가극단에 참여, 지방순회공연을 많이 했답니다.
1943년, 이화중선은 재일한국인 노무자 위문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일본 세도나이까이 부근 바다에서 투신자살을 하게 됩니다.
평소 지병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흰 치마저고리에 소박한 차림으로 무대에 잘 올랐던 이화중선의 최후에 대해 다른 얘기도 전해 옵니다..
그녀는 임방울과 음반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 각지 순회공연도 성공적으로 가졌다는 군요.
이화중선은 큐슈 공연을 마치고 오사카행 연락선을 타고가다 한밤중에 바다로 뛰어들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고 하네요.
그녀는 아편중독에다 결핵을 앓았다는 설도 있어요.

그러나 그녀의 죽음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절박한 그 무엇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45세의 한창 완숙한 나이였을 때니까요.
그래서 여객선이 침몰하여 죽었다거나, 그녀가 타고 있던 배가 미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다는 등의 얘기도 전해오고 있어요.
그녀는 일본 바다에서 한많은 생애를 마쳤지만, 소리의 혼은 지리산 남원 땅에서 지금도 외롭게 떠돌고 있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