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철 음식과 미련한 착각

by 두레네집 posted Mar 2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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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인가 아직도 잔설이 남아있을 때에 참외를 먹었습니다.
무쪽보다 맛없는... 오이도 아니고 호박보다도 달지 않는 말로는 성주참외를.
여름날 나이롱참외 사라고 리어카 아저씨가 소리지르던 서울 변두리의 기억에
노란 색을 길가에서 보자마자 사온 것이었습니다.
3월 들어 딸기를 사먹었습니다. 제 기억엔 앙징스런 꽃을 4월에 보고
5월에나 되야 밭에서 먹을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딸기밭둑에 앉아 방금 딴 딸기를 바구니에 담아 오는 대로 먹어치우던 기억.
전 딸기를 좋아합니다. 그 딸기 맛을 못잊어 해마다 딸기만 보면
비싼 가격에도 매장 판매대를 빙빙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이 맛이 아닌데,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저어대니...

사람들은 참 미련하지요.
무슨 성질들이 그리 급해서 한 몇 달만 되면 하늘 아래
심어만 놓으면 절로 자라 다른 짓 안하고도 달고 맛있고 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돈 들여 비닐 하우스 짓고 추우니 안열릴까봐 비싼 기름 때면서 억지로 열리게 만든,
그래서 일조량도 부족해 맛도 없고 정상적 산물에 비해
영양가도 형편없는 과일을 비싼 돈 주고 사먹는 겁니다.
그리고는 정작 5월에 딸기를 찾으면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한 두 달씩 기간을 늦추면 값도 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한 두 달 빨리 먹는다는 점만 중시해서
비싸고 맛없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는지...
솔직히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개도 웃을 짓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하동 어느 동네에 가면 녹차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해
일찍 순을 따는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녹차 품질이 더 좋아 맛있는 것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돈 많이 받으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녹차의 가격 구조는 다른 작물과 다르게 형성되어 있답니다.
새 봄 들어 처음 나는 잎이 가장 비쌉니다.
곡우 이전에 따는 것이 비싼 상등품으로 흔히 우전차라고 말합니다.
이후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녹차 잎도 점점 커져
세작, 중작, 그리고 엽차용으로 가격이 점점 떨어집니다.
처음에 kg당 몇 만원 하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싸져 돈 천원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가격구조가 제품의 질보다도 날짜에 따라 결정되는 조금 이상한 형태입니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제대로 된 잎이 나오기도 전에 온실 속에서 뻥튀기한 잎이 노지에서
재배한 것보다 내내 계속해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일은 곰곰히 생각하면 남들이 가져야 할 몫을 도둑질하는 셈이 됩니다.
마치 생일이 빠른 사람이 늦은 사람보다 내내 좋은 사람이라고 이권을 차지하는 격이지요.
생명체는 너 나없이 한번 순환하는 구조입니다.
돋아나면 여리다, 커지다, 꽃피고 열매맺고 잎 지는 절차에 너 나없는 일이지요.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부실함에도 특권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데...
자연적으로 얻은 세작을 채취하는 시기에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된 조금 큰잎을 세작차의 시세로 받는다면 그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한편으론 먹을 수 없는 시기에 돈들여 만들어내는 이른 과일이 무슨 죄가 있겠는지.
맛 없는 것을 골라 먹으면서도 남보다 앞서서 만들고 먹었다는 경쟁의 도취감이 문제지요.
속지 말아야 하는데
자연의 정기를 받고 제 철에 돋아난 것이 먹는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임을.

5월에 나는 것 5월에 먹고 8월에 나는 것 8월에 먹는 이가 건강할까요?
8월에 나는 것 5월에 먹고 5월에 나는 것 2월에 먹는 이가 건강할까요?
모든 만물에는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해가 긴 여름에는 일찍 일어나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좀더 길게 자는 것이 좋은데,
사람들은 시계의 잣대가 정해놓는 규칙이 중요하다고 떠들고 있네요.
여름의 일곱시와 겨울의 일곱시가 다른데도 말입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리에 드는 것이
무릇 생명있는 숨붙이들의 하루인데도 말입니다.
이 우주에서 사람만이 적대하고 서로 경쟁하느라 제대로 못사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