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기습 철거한 말벌 집

by 두레네집 posted Jul 2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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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용두동 재개발로 오갈데 없는 저소득층 주민을 철거용역(말이 그렇지 깡패래요)반이 들이닥쳐 사람과 물건을 구별하지 않고 부셨더라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며칠 지나 북한산 관통 서울외곽 도로를 반대하는 절집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저도 모든 미물이 채 잠이 깨기도 전에 누구네 집을 부시고 불태워버렸답니다.
잔인하지요. 저도 제안에 그런 무지한 방법을 시행할 마음을 품었다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유인즉은 일주일 전에 이레가 소리 소리를 지르는겁니다.
"아빠 아빠 말벌 집이에요"
눈 나쁜 저는 물론이려니와 우리 식구 모두 알지도 못하는 새에 학교 처마밑 유리창 근처에
해골모양 같이 허연 통이 매달려 있고 그 아래로 주먹만한 말벌이 붕붕거렸습니다.
그 아래를 지나가기도 무섭게 붕붕거리는데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곧 휴가 기간이라 어린애들도 올텐데 쏘이면 어쩌나 짐짓 걱정이 되는 겁니다.
작년인가 말벌에 쏘여 죽은 아저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두 마리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아예 집을 짓고 들어앉았으니 저를 어째...
지난 봄에 뒤곁의 처마 밑에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워도. 그냥 두었는데.
왜 하필 말벌이냐? 싶어지더군요. 같이 동거하기에는 내 맘이 안편했습니다.

작년가을 밤따러 산에 가서도 밤이 많은 골짜기에 말벌 집이 있어 근처도 안갔는데...
이번에는 그거하고는 상황이 다른 것이었기에 말벌들에겐 안됐지만 퇴거시키기로 맘먹고
실내에 들어가 창문을 꼭 닫고는 창틀 유리를 두들겨 보았습니다.
거미 똥구멍에 줄 나오는 것보다도 빠르게 순식간에 손가락만한 씨커먼 놈들이 줄줄이 사탕 저리 가라로 튀어나왔습니다. 곤충촬영 비디오카메라 있으면 볼만한 광경이었습니다.
속으로 나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비디오 하나 만들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삼삼한 구경거리였습니다. 한가한 볼거리도 잠시.
다시 예의 그 걱정거리에 턱 아래 손을 괴고 고민할 밖에요.
도시 같으면 119구조대 불러서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해볼텐데. 시골에서 그런 전화하면
"댁이 하쇼" 할게 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 생각입니다. 안 그럴 수 있지요).
돌 던져 떨어트리려니 십중팔구 유리창이나 깨고 일만 그르칠 것 같고
섣불리 에어졸 분사약 뿌려야 말벌이 단박에 죽을 것 같지도 않아보이더군요.

며칠 고민하고 두고보다 어제 저녁에 교회모임날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거리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전에 김집사님 외양간 위에 말벌이 집을 틀었다는군요.
건드리지 말라구 대책 안선다구 그냥 두었답니다. 방학이 돼서 도시에 있던 애들이 돌아와 일을 저질렀는데, 당사자는 멀찍이 서서 긴 대나무로 벌집을 따려고 했다는데
그게 잘되지 않고 벌통 가운데만 푹 뚫어놨대나 어쨌더나...
벌들이 쏟아져 나와 괜히 그 아래서 여물이나 씹고있던 소 잔등이를 마구 쐈더랍니다.
그래서 소가 마구 날뛰니 외양간 기둥이 뽑히고 모두들 아!뜨거라 도망치고 문제만 커졌다고 해서 하하거리며 웃긴했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싶어지네요.
권사님이 옷무장 단단히 하고 불로 태우는게 제일로 좋다고 그러더군요.

집에 돌아와 하염없이 TV를 보고 있는데 산불방제 실험한다고 맞불 놓는 장면이 언뜻 나왔습니다. 화염방사기를 쏘더라구요. 나도 저런게 있으면 좋겠다 헸는데 묘수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벌들이 깨나기 전에 서둘렀지요.
소방대원처럼 우비를 입고 안에는 두꺼운 긴 팔 옷도 입고 장화를 신고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커다란 양파자루를 뒤집어썼습니다. 나도 내 모습을 안봤지만 외계인 토벌대 같겠다 생각되어지더군요. 손에는 에어졸 분사약통을 들고 다른 손에는 라이타를 들었습니다(애들은 따라하지 말 것).
라이터를 키고 그 앞에다 약을 쏘니 화염방사기가 따로 없었습니다.
말벌들이 바로 줄줄이 튀어나왔지만 반 수는 뜨거운 열기에 날개가 호르르륵 타서 밑으로 떨어지고 몇몇 놈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단 3-4분만에 상황이 종료됐습니다.
벌집이 생각보다 쉽게 타더군요. 꽃가루와 벌의 분비물로 만들었으니 부실하겠지만...
바닥에는 이삼십마리가 불타죽고 나머지는 한동안 집 자리에 머물러 붕붕거립니다.
철거된 집자리가 미련이 남는지 아직까지도 여남은 마리가 주위를 왔다갔다합니다.

어릴 때 이웃집 할머니가 마루 위 지붕 아래에 둥지를 틀던 제비집을
"이놈 시끼들 똥이나 싸고 지저분하다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마구 부수는 것을 보며
흥부네 박씨 주던 동화를 교과서로 배우던 때라 그렇게 안타까웠었는데
그래서인지 제비가 울던 소리
"지지배배 지배지배 지지배배" 소리가
내 귀에는
"집에집에 지지배배 집에집에"소리로 들렸는데...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하는 가혹한 도시빈민 철거반의 집부수기를 경멸했었는데...
집에서 살겠다고 집에 집에를 외치는 놈들에게 참 미안한 처사를 저질렀습니다.
벌들에게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변명하자면
",할 수만 있다면 자기만 아는 치사한 사람 집에 얹혀 살지 말구 저기 큰 나무 있잖니?
거기서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나도 좀 편할 것 같아. 미안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