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이른 겨울 저녁날

by 두레네집 posted Nov 2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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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메고
익을대로 익은 홍시감 하나
온 잎사귀 모두  
바람에 홀렸는데
서릿발 생채기로 견뎌냈다.


이젠 날 풀린 오후
햇살 담은 보시 주머니로
대 끝에 걸려 내 안에 있다.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는 생물들이 많아집니다.
학교 창틀에도 겨울을 나려는 무당벌레들이 잔뜩 모여 들어옵니다.
구석진 낙엽더미들 아래에는 통통하게 살진 굼벵이들이 있는데
하나 남은 우리집 콕콕이는 이를 찾느라 뒷발질이 하루종일입니다.
털복숭이 된 또또는 양지녘 햇볕에 졸다 드나드는 주인 발소리에 꼬리를 쓸고.
냇물가에 어른거리던 물고기는 이젠 보이지 않고 허전한 바위만 남았습니다.


풀섶에 영글지 못한 호박은 서릿발에 거덜나고 발길에 채여 애잔합니다만
남은 씨앗 챙기려는 뱁새들의 좋은 밥통이 되었습니다.
삭아버린 고추는 지지대만 남긴 채 흔적도 없습니다만 매운 내 나는 것 같기만 하고
한 철 우리 집 수채 개울을 맑게 해준 미나리와 부레옥잠이 시들어갑니다.
모든지 사그러져만 가는 철임에도 지금 심으라는 녹차 씨앗을 한 자루나 얻어왔습니다.
섬진강 건너 흑염소도 얼어죽었다는 백운산 북쪽 기슭의 축사에는
내년 여름에나 죽을 개들이 들어와 한창 짖어대고 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에 몸을 뎁힌 파리는 둔하게 천장으로 날아오르고
산에 베어낸 밤나무 가져다 때라는 아랫말 아저씨 말은 귀가에 쟁쟁하지만
매운 난로연기 맡기 싫다는 핑계를 내세우는 저는 게으른 시골사람입니다.
철 이른 겨울 밤 어제저녁 자려다 벌떡 일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즘 잘 지내고 있느냐는 내 안의 물음에서 시작한 저는
모든게 당당하다고 내세울 수 없는 부끄러움 많은 사람임을 또 확인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고백처럼 하늘 앞에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려면
이 고요한 겨울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을 보내도록 마음을 다잡습니다.


뉘라도 햇살과 비를 머금습니다.
산하와 들녘의 모든 숨붙이가 익어갔지만
쭉정이로 남은 나는 이 겨울
알곡의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