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취

by 최화수 posted May 21,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의 자취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일손(金馹孫)은 ‘두류(頭流)기행록’에서 신흥사 앞 나무다리에 이르렀을 때 운중흥(雲中興) 료장로(了長老) 두 스님으로부터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죽지 않고 신선이 되어 청학동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신흥사는 사라졌지만, 그 주위의 ‘洗耳岩(세이암)’과 ‘三神洞(삼신동)’이라는 각자(刻字)는 고운 선생의 발자취로 남아있다.

1558년 봄, 지리산을 찾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은 불일폭포 협곡을 내려다보며 “여기가 세상에서 말하는 청학동(靑鶴洞)이다. 바위와 봉우리가 하늘에 매달린 것 같아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다”고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썼다. 김일손 역시 “신선이 살만한 곳으로 청학동이 분명한 듯하나 지형이 험난하여 원숭이가 아니고는 찾아들 수가 없다”고 했다.

신라의 석학 고운 선생은 그 깊은 협곡으로 들어가 큰 바위 속 천연 암굴에 기거하며 ‘공부’를 한 끝에 신선이 되어 영생의 천수를 누린다고 전해진다. 이 천연 암굴의 큰 바위가 ‘옥천대(玉泉臺)’이다. 잠을 잘 수 있는 공간과 서재와 같은 또다른 공간이 있는데, 신통하게도 그곳에 책 한 권 크기로 햇빛이 비춰들어 고운 선생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남명 선생은 불일협곡을 청학동으로 단정하고 이렇게 썼다. “어느 사람이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어 세우고 겨우 입구에 들어가서 이끼 낀 돌 하나를 주워서 보니 ‘三神洞’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용추폭포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용소(龍沼)가 있는데, 신선이 된 고운 선생이 이곳을 통해 지리산과 가야산을 오고간다는 것이다.

지리산이 너무 좋아 20여 년 곳곳을 헤매고 다닌 필자는 청학동 후보지의 한 곳이라는 불일폭포 협곡에 매료되었다. 지형이 험난한 만큼이나 자연경관도 신비롭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히 불일폭포 입구의 오두막 ‘봉명산방(鳳鳴山房)’을 지켜온 변규화(卞圭和) 옹이 최치원 신선(?)과 관련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영향이 컸다.

변 옹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지성인으로 뜻한 바 있어 상불(上佛, 불일폭포 상류 골짜기)의 토굴에서 10년가량 도를 닦았고, 3년 동안 승려생활을 한데 이어 다시 10여 년째 봉명산방을 지켜오고 있었다. 그이는 신선이 된 고운 선생이 지리산과 가야산을 오간다는 불일협곡 용소 등의 얘기를 필자에게 아주 실감나게 들려주고는 했다.

지리산 불일폭포는 쌍계사를 거쳐 오른다. 쌍계사는 석문을 지나 찾게 되는데, 나무뿌리를 하늘로 세운 장승 옆 좌우의 자연암석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쓴 ‘雙磎’ ‘石門’이란 큰 글자가 음각돼 있다. 사찰로 들어서면 대웅전 앞의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를 만나는데, 글을 짓고 쓴 주인공이 고운 선생이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오르는 길에 ‘환학대(喚鶴臺)’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고운 선생이 청학동(靑鶴洞)을 찾아다닐 때 여기서 학을 불러서 탔으며, 진감국사대공탑비문도 이곳에서 지었다고 한다. 환학대에서 1㎞가량 위쪽에 변규화 옹의 불일오두막 ‘봉명산방’이 있고, 거기서 300m 더 가면 ‘청학동’으로 언급되기도 하는 불일협곡이 자리한다.

원숭이가 아니면 찾아들 수 없다는 불일협곡에 필자가 기어코 발을 들여놓은 것도 변규화 옹의 도움을 받고서였다. 그이는 거의 수직 낭떠러지를 성큼성큼 걸어서 내려갔지만, 필자는 간이 콩알만 해진 채로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내려설 수 있었다. 용추폭 밑의 용소와 옥천대를 들러보았지만, 다른 징담(澄潭)이나 천연암굴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유사 이래 지리산에서 은거했거나 수도정진 또는 ‘공부’를 한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신선이 되어 영생한다는 이는 오직 한 사람, 고운 최치원 선생뿐이다. 왜 그럴까? ‘한국 도교(道敎)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고운 선생은 불교나 도교, 노장(老莊)사상, 풍수지리설 등에 해박하여 후세 도인들의 마음속에 ‘득도한 신선’으로 각인된 때문이리라.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제’ 개막과 함께 ‘해인사 소리(蘇利)길’이 탄생했다. 홍류동(紅流洞)계곡을 자동차를 타고 스쳐 지나치던 것을 자연친화의 명품길을 따라 걸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물소리, 산새소리, 바람소리 등 생명의 소리와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걷는 숲길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고운 선생의 진정한 자취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아주 기뻤다.

고운 선생이 가야산 해인사로 찾아들며 속세와 인연을 끊기로 다짐하며 지었다는 청산맹약시(靑山盟約詩), 이른바 ‘입산시(入山詩)’에서 우리는 그이의 진정한 마음을 읽게 된다.

僧乎莫道靑山好

山好何事更出山

試看他日吾踪跡

一入靑山更不還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시오

뒷날 내 자취 시험해 보시구려

청산에 한 번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니.)

백옥 같은 암반 위로 청아한 물소리가 음악처럼 흐르는 이 홍류동 계곡길에 들어서면 시간 개념마저 사라진다. 소리길은 지리산 불일협곡과는 달리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을 열고 자연과 역사에 동화될 수 있다. 이 길 가운데 가장 수려한 곳에 고운 선생의 자취가 서린 농산정(籠山亭)과 그의 둔세시(遁世詩)를 새긴 제시석(題詩石)이 있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미친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세라,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김쌌네.)

고운 최치원 선생이 탈속(脫俗)의 소회를 적은 시, 칠언절구의 둔세시가 이렇게 전해온다. 이 시는 그이가 얼마나 소박하게 자연에 귀의하려 했는지를 분명하게 들려준다. 그이의 ‘청산맹약시’나 ‘둔세시’는 지리산에 떠도는 ‘고운의 신선설’이 얼마나 엉뚱한 지를 말해준다. 고운 선생이야말로 탈속의 순수자연인이다, 해인사 소리길이 그것을 깨우쳐준다.
                                                                                                                                      - 월간 海印 2015. 5. 재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