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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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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4월7일 부산 대륙산악회 회원들의 지리산 등정 때 복원 공사중인 법계사에 들러 한청화보살과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김건일, 한청화 보살, 곽수웅, 김구수씨. (부산산악포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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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사(法界寺). 천왕봉 남쪽,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9년(548)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에 이어 세운 사찰이다.
1천5백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이 절에는 최초의 지리산 기행기를 남긴 이륙(李陸)이 세조 7년(1461) 청운의 뜻을 품고 말바리에 수백 권의 책을 싣고 와 3년 동안 머물면서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도 머물었다고 하여 바로 인근 바위 이름이 ‘문창대(文昌臺)’로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절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의 방화로 소실된 데 이어 1908년 다시 의병의 근거지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1938년 신덕순(申德順) 보살이 사찰을 복구했으나, 1948년 10월19일 여순병란의 격전 속에 다시 붙태워졌다.
현재의 법당은 1981년 조재화(曺在樺), 재연(在鍊), 재영(在永)씨의 불사로 세워졌다고 사찰 앞의 현판에 기록돼 있다.
그렇지만 많은 등산객의 기억 속에는 법당이 세워지기 이전의 20여 년 동안 절터를 지키고 있던 작은 초막(草幕)이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1948년 소실된 법계사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폐허로 방치돼 오다 1957년 지리산 입산통제가 풀리자 가까운 곡점부락(경남 산청군 시천면)의 독실한 불자가 하나의 초막부터 세웠다. 한청화 보살(본명 손경순)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법당 복구에 전념, 10년 동안에 걸쳐 불사를 벌인 끝에 법당의 뼈대를 세우고 서까래까지 얹었으나, 재력이 달려 기와도 올리지 못한 채 비에 젖게 버려두었다가 그만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법계사의 법당 세우기와는 별도로 한 보살의 법계사 초막은 1957년 이래 20년 동안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귀중한 휴식처이자 피난처로 이바지했다.
한 보살이 초막을 세운 바로 그 무렵부터 한국산악회 경남지부와 부산등산클럽, 대륙산악회 등 부산 산악인들이 때를 맞추어 천왕봉을 찾았다.
당시 원시 장비에 무거운 짐을 메고 등정에 나섰던 부산의 산악인들에게 법계사 초막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법계사 초막은 천왕봉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 ‘감로수’와 같았고, 등정 성공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했다.
한 보살은 등산객들을 언제나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특히 신업재, 성산 씨 등 부산지역 산악인들과 아주 절친한 사이로 따뜻한 인정을 나누었다.
부산의 산악인들만 법계사 초막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한청화 보살도 틈이 나면 부산으로 찾아와 초막을 찾았던 산악인들에게 사찰 불사를 위한 도움을 받고는 했다.

법계사 초막이 이처럼 부산산악인들의 천왕봉 등정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니, 한청화 보살과 부산 산악인들의 따뜻한 인정이 유종의 결실을 거두게 했다.
바로 지리산의 유일무이한 민간 건립 ‘로타리 산장’(일명 ‘로타리의 집’)을 탄생시킨 것이다.
로타리 산장은 1977년 7월에 기공, 78년 10월26일에 완공했는데, 26평의 B급 규모이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산장 건립을 한 것은 1971년 9월의 노고단(40평 A급)과 치밭목, 세석, 장터목 산장(16평, C급)이 최초였다.
로타리 산장은 이들보다 늦게 건립됐으나 최초로 민간단체, 로타리클럽 회원들에 의해 세워진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 주역은 법계사 초막에 신세를 졌던 부산 산악인들이었다.

신업재, 김재문 씨 등 부산의 산악인들은 부산 경남지역의 로타리클럽 회원들은 물론이요, 미국 일본 대만 등 외국의 로타리클럽 회원들에게까지 헌금을 요청, 당시 3천만 원의 건립 기금을 모았다.
하지만 산장 건립비보다 자재 수송비가 많이 먹히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지리산 현지의 조재영(曺在永)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재영 씨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13대 손으로 시천(덕산)에서 지리산만 누비고 다닌 ‘지리산 사람’이었다.
그이는 지리산에서 부산을 16차례나 방문, 산장 건립 자재 수송을 위해 중산리~순두류 도로 개설을 건의했다. 도로 개설비는 산장 건립비보다 훨씬 더 많은 7천만 원이 필요했다.
부산 산악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앞장섰고, 산장이 건립되자 조재영 씨는 산장 관리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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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 2010.05.03 23:40
    로터리산장은 한청화보살과 부산산악인들로 따뜻한우정의
    결실로 로터리클럽 회원들의 의해서 민간 건립된것이군요
    정말 아름다운 산악인들의 우정의 열매이네요
    눈에 보이지않게 어려운문제를 해결하신 조재영님 대단한 열정이시군요
    역시 남명조식 선생님의 13대후손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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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화수 2010.05.04 11:39
    로타리산장은 그 규모와 달리 지리산처럼 아름다운 산정으로 이룩된 것이어서 한층 더 뜻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몇 해 전에는 이 산장이 헐릴뻔 했는데, 민간인 건립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도 보존이 돼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타리산장은 그 내력을 법계사 초막에서부터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며 이 산장을 지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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