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들의 지리산 사랑(8)

by 최화수 posted Apr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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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당시의 법계사 초막. 한청화 보살이 지킨 이 초막은 천왕봉을 찾는 산악인들에세 '산장 아닌 산장'의 귀중한 역할을 했다.(김경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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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2일 오후 2시.
지리산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 및 학술조사대 본부반은 천신만고 끝에 통천문 쪽을 뚫고 천왕봉에 올랐다.
강한 눈보라가 얼굴을 때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녀들이 놀았다는 그 아름답고 청정한 못과 태고연한 정일(靜逸), 빌로드처럼 자라 있던 만년 이끼와 그 신비경을 떠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한다.

김경렬, 성산 씨 등은 세석고원 쪽에서 시커먼 구름이 눈을 몰고 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서둘러 법계사로 내려갔다.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 및 학술조사대 대장 김경렬 옹은 이날 저녁 갑자기 열이 오르고 지독한 한기와 함께 온몸이 쑤셔 꼭 죽을 것만 같은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법계사 초막의 한청화(본명 손경순) 보살이 온돌을 뜨겁게 데우고 이불을 겹겹이 덮어 누르고 하는 등의 처방을 한 끝에 그이는 밤이 깊은 뒤에야 겨우 열병에서 벗어났다.

그에 앞서 저녁 식사 때 한 보살이 이들에게 손수 빚은 비장의 ‘팔선주(八仙酒)’를 대접했다. 한 보살이 팔선주를 내놓은 것은 성산 씨와의 각별한 정분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팔선주 또는 팔선소주로 불린 이 술은 법계사 초막을 지키던 한 보살이 손수 담가 귀한 손님에게만 내놓는 비방으로 알려져 있다.
찹쌀을 소방목(蘇方木), 방풍(防風), 창출(蒼朮), 송절(松節). 선모(仙茅), 모과(母瓜), 우슬(牛膝), 하수오(何首烏) 등을 달여서 낸 물에 담가서 내는 것이었다.

성산 씨는 이보다 5년 앞인 1959년 10월 천왕봉에 올라 이틀을 보내고, 법계사 초막으로 내려왔는데, 그 때도 한 보살로부터 팔선주 대접을 받았다.
성산 씨는 당시의 이야기를 필자가 펴내던 <우리들의 산>(1991년 6월호)에 실었는데, 당시의 법계사 초막이 어떠했는지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은 성산 씨가 손수 쓴 글이다.

‘천왕봉에서 법계사 초막으로 내려오니 약속대로 한 보살님이 팔선주로 환영한다. 팔선주는  8가지 나무껍질과 뿌리로 빚은 술인데, 청주처럼 노르스름한 것이 굉장히 독했다.
바깥 날씨는 무척 차가웠는데, 얼마나 군불을 땠는지 엉덩이가 뜨거워 오고 술기도 도도하게 올라 흥이 절로 일어난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쏴 하고 바람이 불 때면 신문지나 돌가루 포대 같은 것으로 도배한 천정이며 벽이 벌렁벌렁하고, 동시에 흙먼지가 촛불 속에서도 뿌옇다.’

법계사가 불타고 없어진 뒤 이 사찰의 중흥불사를 위해 초막이 마련됐고, 그 초막을 한청화 보살(본명대로 손 보살로도 불린다)이 지켰다.
법계사 초막은 당시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던 이들에게는 ‘산장 아닌 산장’의 귀중한 역할을 했는데, 1974년 12월 18일 천왕봉에 올랐던 필자도 이 초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법계사 초막과 한 보살, 성산 씨와 부산의 산악인들은 각별한 정을 나누는데, 그것이 곧 ‘로타리 산장’을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는 그 직후에 아주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지리산 전체 등산로 안내표지판을 세운 것이 그것이다.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과 학술조사대에 참가했던 대륙산악회의 곽수웅 씨와 자일클럽의 박창수 씨는 경상남도로부터 지리산 전역의 등산로 안내 표지판 설치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그 해 12월 하순부터 다음해 1월 초순까지 혹한기에 약 보름 동안 다시 지리산 일원을 누비고 다니며 힘든 작업을 완수한 것이다.

이들은 그에 앞서 1964년 10월7일부터 12일까지 칠선계곡 예비조사 때 의탄 등 일부 지역에 안내표지판을 부착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지리산 주요 등산로에 대대적으로 안내판을 설치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지리산을 관할하고 있던 경상남도가 시행한 안내표지판 설치 작업이 지리산 등산의 대중화 및 활성화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그 작업의 주역 또한 부산 산악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