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들의 지리산 사랑(2)

by 최화수 posted Dec 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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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열린 스키대회 현장 모습의 하나. 이 스키대회에서 부산의 신업재, 이재수 님 등이 즉석 제안을 하여 지리산 첫 스키종주산행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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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금수강산도 참답고 아름다운 자태로서 우리 손으로 돌아오니 이 산천의 향토를 토대로 해서 조선도 세계에 진출하여 자랑하고 견줄만한 산악문화를 세워볼 희망과 정열이 누구나 불타오를 것입니다. (후략)’

해방 한 달 만인 1945년 9월15일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 전신)가 탄생했는데, 위의 글은 그 결성취지문의 일부이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 등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조선산악회는 진단학회(震檀學會)에 이어 두 번째로 활동을 시작한 사회단체이다.  

서울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조선산악회 창립총회에는 산악인 75명이 참가했는데, 회장 송석하(진단학회회장), 부회장 최승만(미군정청 문화국장) 김상용, 고문 이상백 신성우 민원식 씨 등을 선출하고 이사와 간사로 된 집행부를 구성했다.

조선산악회는 국토구명(國土究明)사업의 첫 행사로 1946년 2월28일부터 3월18일까지 적설기 제주도 한라산 학술등반을 했다. 이 학술등반에 부산의 신업재, 이재수(李在睟) 씨 등이 참가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산악회 경남지부 발족이 준비됐다.

조선산악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946년 4월15일 부산에서도 처음으로 산악단체가 탄생했다. 곧 조선산악회 회원인 신업재 이재수 씨가 주축이 되어 발족한 조선산악회 경남지부였다. 당시에는 부산시가 경남도에 속해 있었으므로 회명을 경남지부로 했다.

창립 목적은 ‘산악인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여 산악지식과 그 연구 및 보급을 통해 등산기풍의 진흥을 기하고 자연애호정신을 함양함으로써 나라와 지역사회에 공헌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산악과 등산의 지도 장려를 위한 각종 운동과 연구 등을 할 것도 정했다.

조선산악회 경남지부는 창립기념등반으로 1946년 6월 지리산 등정에 나섰는데, 신업재 회장을 비롯하여 회원 12명이 참가했다. 서울의 조선산악회가 창립기념 등반을 북한산 비봉에서 가진 것과 대조가 된다. 경남지부는 부산의 금정산 등을 젖혀두고 굳이 험난한 지리산을 선택했는데, 지리산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해(1947년) 2월에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전국 스키대회가 열렸다. 화엄사에서 모든 장비를 인력으로 나르고, 야영을 하며 치러진 경기였으나, 적설량이 충분치 않아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어쨌든 한국에서 처음 치러진 스키대회였다.

이 스키대회에 참가했던 부산의 신업재, 이재수 씨는 본부의 김정태 고희성 박순만 씨 등과 함께 즉석에서 꾸려진 조선산악회 본부, 경남지부 합동 지리산 적설기 스키종주를 가졌다. 당시에는 산악인에게 스키가 필수 요건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한편 일제 말기 함경도 함흥 영생중학교에서 생물교사로 재직하면서 백두산에 여러 번 올라 생태계와 식물분포를 조사하여 책으로 펴낸 김하득 씨가 해방 다음해 부산 동래중학교(6년제) 교장으로 부임했다. 김 교장의 영향으로 동래중산악부가 탄생했다.

동래중 산악부도 1947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지리산에 올랐다. 김정수 인솔교사와 이종호 대장을 비롯하여 5학년 김동주 최문환, 3학년 이백기 배준호 박기복 한철우 등 학생 16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부산 근교의 영축산 천성산 신불산 등지에서 체력강화 훈련을 했다.

동래중 산악부의 지리산 등행 노정이 눈길을 끈다. 하동군 청암면 평촌(1박)~묵계리(청학동)~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세석평전~촛대봉~장터목~천왕봉~중산리(2박) 코스였다. 원래는 산청에서 써리봉을 거쳐 천왕봉에 오를 계획이었으나, 산청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 루트를 바꿨다고 한다.

교통편은 부산~진주는 기차편을 이용했고, 하동군 횡천면까지는 목탄 트럭을 얻어 탔으며, 다시 걸어서 청암면 평촌리에 도착했다는 것.
혹시 산짐승을 만날까봐 검도용 목검(木劒)을 가지고 갔다는 이종호 대장이 당시의 등산차림 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그때는 등산로 초입인 평지부터 무거운 배낭을 지고 강행군을 해야 하는 고된 산행이었다. 등산복이 없었던 시절이라 교복과 교모 차림에 책가방을 배낭삼아 짊어지고 미지의 땅인 지리산에 오르는 것은 기대감과 두려움이 엇갈린 묘한 심정이었다.”

이들은 산행을 끝낸 다음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들에게 지리산의 등산로와 수목대, 식물분포대, 기후대 등에 대한 보고회를 갖기도 했다.
동래중학교 산악부의 지리산 등정에서도 부산 사람들의 지리산 사랑을 엿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