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국, 마고성, 삼성궁(三聖宮)(4)

by 최화수 posted Aug 2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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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삼성궁 경내. 건국전 앞쪽에 태극 문양의 연못을 만들어두었고, 연무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장승들의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사진 위와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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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있다.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말이니 그 변화가 얼마나 심하면 그렇게 되겠는가.
요즘 지리산 삼성궁을 찾게 되면 저절로 떠오르는 말이 이 상전벽해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9년을 전후하여 여러 차례 청학동과 삼성궁을 찾았던 필자의 눈에는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삼성궁 경내만이 아니다. 진입도로 주변을 비롯하여 청학동 골짜기 전체가 지난 수년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삼성궁과 연결되는 2차선 포장도로, 그리고 드넓게 조성된 주차장, 상가 건물 등등 개발의 바람이 눈을 놀라게 한다.
뽕나무밭을 바다로 만든 변화의 바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삼성궁은 배달민족의 성전으로 신선도를 수행하는 민족 고유의 도량이다. 삼성궁은 또한 지리산의 이름난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30만 명에 이른다.  
삼성궁 매표소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 ‘청학동 박물관’이고, 그 옆이 ‘청학 장터’이다. 건국전에서 돌아나오는 길도 물품을 파는 가게를 거쳐 나오게 돼 있다.
수행도량과 관광명소, 어느 쪽이 우위인지 아리송할 정도이다.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줄을 지어 삼성궁을 견학하는 모습은 여름철 내내 목격이 된다.
관광버스에 실려 온 단체관광객들도 줄을 잇는다.
삼성궁을 찾는 관광객이 많은 데는 하동군의 관광 진흥시책 영향도 있다.
하동군은 청학동과 삼성궁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오랜 기간 많은 투자를 해왔다.
삼성궁을 관광명소로 만들고자 하는 하동군의 의지는 나름대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하지만 이 성전을 일으켜 세운 주인공인 한풀선사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는지 궁금하다. 삼성궁 자체 제작 팸플릿을 보자.
“1987년 늦가을, (한풀선사는) 한무와 종철 두 수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삼칠일(21일) 단식에 들어간다. 토굴을 봉한 채 공부에 들어간 삼칠일 동안의 단식 고행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중략) ‘나 자신을 열지 못하면 다시는 햇빛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삼칠일을 더 연장했다.

(한풀선사의) 몸은 짓물러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오장은 말라 비틀어졌다. 썩어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한풀선사는 삶과 죽음의 무상함을 맛보았다.
그렇게 두 번째의 삼칠일 고행을 끝냈지만 공부에는 별다른 진전이 오지 않았다.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한풀선사는 또다시 삼칠일을 연장했다.
이번에는 ‘공부’라는 생각 자체도 ‘나’, ‘우주’ 등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애써 던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더 이상 붙잡고 버틸 힘이 없어 그저 그렇게 놓아져버렸다. 그러한 가운데 섣달 그믐날이었다. 그믐은 한풀선사를 무명(無明)으로 엄습하고 지나간 뒤 밝은 기운으로 통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한풀선사에겐 선악(善惡)도 없어지고, 후박(厚薄)도 없어지고, 청탁(淸濁)도 사라졌다.
때 묻은 허물을 벗어던진 한풀선사는 새벽녘 봉황의 울음을 들으며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 그리고 셋  

하늘 위에는 구름이 열렸는데
하늘은 어디에 열렸나
땅 위에는 나무가 심겼는데
땅은 어디에 심겼나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맺혔는데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에서 와
셋으로 달리네
알 수가 없네
세상의 법리를
알 수가 없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