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길, 지리산 가는 길(5)

by 최화수 posted Feb 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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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요즘 지리산 유평계곡에 걸려 있는 교량의 모습이다. 지난 1980년대 초반의 나무다리와는 너무나 다른 그림이다. 지리산의 시설물들이 지난 20~30년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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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0월9일 한글날, 때마침 연휴를 맞게 되어 우리 산악회는 1박2일 일정으로 노고단과 조계산 산행에 나섰다. 하지만 우리는 첫날 노고단 산행에서 조난을 당했는데, 필자의 에세이집 <달 따러 가자>(1986년 도서출판 국제)에는 그 전말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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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아침에 출발한 우리 일행은 화엄사의 여관에 여장을 풀고 점심밥까지 지어먹은 뒤 사찰 경내의 국보인 각황전과 석등, 4사자3층석탑 등을 둘러보고 난 뒤에야 진하게 물든 단풍이 온통 불타오르는 계곡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1506m의 노고단에 닿고 보니 이미 석양 무렵이었다. 우리 일행 40명 가운데 노고단에 오른 시각이 너무 늦었다거나 다시 하산하는 문제를 걱정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노고단에서 보는 불타는 단풍의 지리산 영봉들과 반야낙조의 황홀경에 도취하는 것만도 숨이 가쁠 따름이었다.

손짓을 하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풀밭에 드러눕는 사람…제마다 즐거운 탄성과 달콤한 휴식에 젖어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노고단의 황홀한 풍광에 빠져 우리들의 정신은 익사상태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 짧은 시간은 어찌 도 그렇게나 빨리 흐르는지….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일몰이 되기 전에 하산을 서둘러야 합니다.”
길 안내를 맡았던 내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이 말을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있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 만 척하는 회원들을 가까스로 이끌고 무너미를 거쳐 코재로 내려서려니 그 눈부시던 금빛 단풍의 산자락도 거뭇거뭇 어둠에 물들기 시작했다.

노고단에서 화엄사까지 3분의 1의 거리도 못 내려온 상태에서 우리는 완전한 어둠에 갇혔다. 그 많은 회원 가운데 누구도 랜턴을 휴대하지 않았다. 나무숲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별빛 한 가닥조차 없었다. 눈앞의 한 치도 분간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길바닥의 돌을 차고, 바위에 부딪히고, 나무등걸에 걸리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비명만이 자지러지게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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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릴 이 이야기는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무모하게 지리산을 찾아 나섰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우리 산악회는 창립 직후 네 번째 목적지로 노고단을 선택했고, 전문가이드도 없이 '천방지축 산행'을 나섰다가 조난을 당한 것.

1980년대 초반에 들면서 우리나라에도 산행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초기에는 산악지식이나 산행정보를 잘 아는 이들이 아주 드물었다. 무턱대고 산행에 나서기가 일쑤였고, 그래서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리산은 더구나 무슨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다. 우리에게 지리산은 여전히 멀고도 먼 곳에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