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땅 최후의 원시림 지대'(5)

by 최화수 posted Mar 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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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부산 대륙산악회 성산님은 '칠선계곡 학술조사대' 선발대원으로 먼저 '최후의 원시림'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이는 계곡 중턱에서 도벌한 아름드리 나무들을 '목마로(木馬路)'라는 기상천외의 길(?)로 산 아래로 운반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목마로보다 훨씬 더 용이한 방법으로 도벌한 목재들을 산 아래로 운반하는 또다른 것이 있었다는 군요.
이른바 '도벌 댐'인데, 성산님은 이를 고발하는 글에서 '댐식 도벌'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계곡 중에 제일 협소한 곳을 막아 간이 댐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속에다 마구 벤 나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하나씩 계곡물에 흘려내려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곡에 나무들을 쌓아올린다.
여름철 어느날 집중호우가 퍼부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댐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부산에서 펴낸 산악회지 <우리들의 산> 1991년 11월호에 실은 성산님의 글이다.
'도벌 댐'에 대한 그의 고발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상봉골 중봉골 하봉골 국골 도깨비골에서 넘쳐나는 거센 수압력을 이용해 처음부터 장치된 댐을 손쉽게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도처에 흘러드는 계곡물은 거센 파도처럼 되어 계곡에 넘치면서 쌓여 있던 나무들을 가랑잎처럼 순식간에 계곡 하류로 운반한다.

물론 중간에서 바위나 나무 뿌리에 걸려 운반되지 못하는 것도 부지기수이겠지만, 태산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리는 계곡물의 위력에 견딜 수 없어 부러지면서도 흘러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성리를 지나 의탄을 거쳐 엄천강으로 흐르는 나무들은 용류담을 거쳐 내려오는 신세가 된다.>

이렇게 거센 계류를 따라 흘러내린 나무들은 엄천강 중간 부분, 물살이 세지 않은 곳에서 미리 진을 치고 있던 인부들에 의해 수거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또 적당한 길이로 잘려진 나무들은 트럭에 실려 남원으로 이송되었어요.
남원에선 다시 기차에 실려져 당일로 서울까지 운반되거나 부산 등지로 흘러들었다니 놀랄 일이지요.

전란 직후 지리산에서의 도벌은 기업형으로 이루어졌어요.
당시의 상황 일부는 김명수님이 지은 <지리산> 책에 씌어져 있습니다.
칠선계곡에서 '목마로'와 '도벌 댐'을 이용한 무차별 도벌이 이루어진 전후 사정을 능히 짐작해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일부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리산이 평정된 얼마 후 지리산 난민들을 돕는 사업을 펼친다며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지리산개발주식회사'였다.
이 회사는 지리산 난민 정착사업을 돕기 위해 발족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지리산의 목재들을 팔아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삼흥흥업주식회사'라는 벌채업소가 서울영림서로부터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삼정리 추성리 일대 국유림 내의 고사목 풍도목(風倒木)에 한해 벌채허가를 받은 것이 1963년 9월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이 회사는 남선목재와 서남흥업공사로 전매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벌채목 반출 기간과 허가 지역이 늘어나고, 급기야는 생목 아름드리 나무까지 마구 베어내 기업형 도벌로 변질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