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땅 최후의 원시림 지대'(3)

by 최화수 posted Feb 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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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선계곡 들머리에 `두지터'가 있어요.
이곳 지형이 쌀 뒤주를 닮았다고 하여 `두지터'라 불리게 됐다네요.
또는 옛날 가락국 어느 임금이 국골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식량창고로 이용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추성리, 두지터, 얼음터, 국골 등 칠선계곡 일대 지명과 관련된 야사(野史)들도 전해오고 있어요.
`신동국여지승람' 함양군 편에 천왕봉 고성(古城)에 관한 기록이 보입니다.
`일명 추성(湫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하며, 의탄(義灘)에서 5~6리 떨어졌는데, 마소가 갈 수 없는 곳이고, 안에는 창고가 있다. 세상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가락국' 또는 `신라'로 혼동이 되어 불리는 것은 칠선계곡과 가까운 왕산의 양왕릉(전 구형왕릉)의 수수께끼와 같은 사연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네요.
구형왕은 가락국 마지막 왕으로 싸우지 않고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여 일명 '양왕(讓王)'으로 불리지요.
구형왕의 아들은 신라의 벼슬을 얻고, 손자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대표적인 장군으로 활약했으니...

칠선계곡의 지계곡인 국골 쪽 좌측 산등성이에는 약 1㎞에 이르는 석성의 흔적이 있습니다.
`두지터'라는 이름과 대조가 되는 것이 광점동 너머 골짜기에 있는 `얼음터'이지요.
이 `얼음터'는 석빙고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냥 전해오는 이야기일뿐,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요.

칠선계곡은 워낙 골짜기가 깊어 많은 역사가 얽혀 있을 법합니다.
두지터에는 근래에도 여러 사연들이 새겨지고 있지요.
`마대에 담긴 원색 여인'도 그 하나라고 하겠네요.
하회탈춤 기능보유자 인간문화재 윤병하(尹炳夏)의 `궁더덕궁' 그림.
두지터 토담 `예술인의 집'의 90년대 삽화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미뤄둡니다.

1964년의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는 첫 답사에 걸맞는 대단한 기쁨도 누렸어요.
계곡을 거슬러오르면서 아름다운 징담을 만날 때마다 `선녀탕' `비선담' 등의 이름을 명명했으니까요
그들은 이 조사대에 합류한 부산 대륙산악회를 위해 `대륙폭포'라는 이름을, 동아대산악부를 위해 `동아폭포'라는 이름을 선물했어요.
그 때 명명한 이름이 그대로 굳어져 있답니다.

하지만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는 무엇보다 최후의 원시림지대에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도벌 실상에 경악해 마지 않았어요.
함지박 등의 목기를 만들기 위해 아름드리 나무가 무차별 잘려나가고 있었으니...!
당시 부(副)대장으로 칠선계곡 학술조사대에 참여했던 산악인 성산씨는 훗날 엄청난 증언을 합니다.
기업형 도벌이 빚어낸 기상천외의 `목마로'와 `도벌 댐'이 그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