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땅 최후의 원시림 지대'(2)

by 최화수 posted Jan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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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에 걸쳐 부산의 학계, 언론계, 산악인들로 구성된 '칠선계곡 학술조사단'(단장 김경렬)이 칠선계곡에 처음 발길을 들여놓았어요.
'학술조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이 목적이었지요.

칠선계곡은 지리산에서 가장 장대하고 또 험난한 곳이지요.
칠선계곡 코스는 그 길이 끝나는 곳이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입니다.
산행 계획을 잡는데 그 만큼 부담이 따릅니다.

칠선계곡은 '남한 땅 최후의 원시림' 지대라고 했습니다.
원시림에 가린 그 신성한 땅은 사람의 발길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돼 있었지요.
그러니까 지리산 주능선 종주산행을 한 사람들 가운데도 이 계곡 코스를 답파하지 못한 이들이 많은 편이에요.

1964년의 '칠선계곡 학술조사단'은 내로라 하는 산악인은 물론, 부산의 기술등반대와 대학산악팀들이 참가했습니다.
지금의 히말라야 원정대와 비교할 수는 물론 없겠지만, 20여명의 대원들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단단한 채비를 갖추고 도전했습니다.

칠선계곡 학술조사대가 7㎞ 가량 전진했을 때였어요.
대원들은 설영(設營) 장소를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원시림의 계곡 중턱에서 목기(木器) 제작소를 발견했어요.
그토록 높고 험한 골짜기에 목기를 만드는 곳이 있을 줄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들은 200~300년의 나이테를 가진 나무들이 베어진 그루터기를 여남은 개나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나무를 잘라 만든 함지박이 쌓여 있는 목기 제작소가 있었다.
스무개 쯤의 함지박이 초벌갈이가 된 채 돌담 안에 포개져 있을 뿐, 아무런 기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작업을 하던 목기꾼들이 아마 연장을 챙겨 도망친 모양이었다.]
(김경렬의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기')

수령 200~300년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무차별 도벌이 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칠선계곡은 당시에도 '최후의 원시림'으로 불릴 만큼 갖가지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는 군요.
명색이 '학술조사단'이자 '등반로 개척단'이 그곳을 찾았을 때 숲 속에는 주민들의 목기 제작소가 성업중이었으니....

등반로 개척단은 숲 속의 이 현실에 경악하는 한편 맥이 빠졌을 거에요.
그들은 길을 개척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천막 하나 칠 곳을 찾지 못해 난감해 했었지요.
그런데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은 숲 속에서 목기를 만들고, 원시림 속에 목기 제작소까지 버젓이 차려놓고 있었으니...

지난해 11월3일, 국립공원관리공단 연구조사부 일행은 7년동안 휴식년제로 보호하고 있던 칠선계곡을 찾았답니다.
칠선계곡 최상층부(해발 1330~1900미터)는 하늘을 가린 원시림지대임이 다시 한번 확인이 됐어요.

키 15~20미터의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잣나무 및 아름드리 주목, 졸참나무 등이 밀림을 이루고 있었지요.
야생 반달곰이 그 안에 들어가 겨울잠을 잔다는 신갈나무 고목도 눈에 띄었답니다.
이 일대의 구상나무 등의 단위면적당 밀도가 10~15% 가량 높아진 사실이 확인되었어요.

해발 1400미터 근처에서 만난 큰 주목(朱木)은 어른 3명이 감싸 안아야 할 만큼 큰 나무로 수령 500년 가량으로 추정이 됐어요.
높이 14~15미터, 흉고 3미터40센티미터로 아마도 남한 최대의 주목일 것이라더군요.
1964년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단이 목격했다는 목기 제작소 얘기를 생생하게 되살려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