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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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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곡마을에서 주민 212명을 학살한 군인들은 다시 아랫마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로 내려가 1시30분경 닿았다.
...(중략)

군인들은 가현, 방곡에서처럼 귀중한 물건과 가축들을 빼낸 다음 주민들을 동네 우물가로 모이게 한 후 20여 호 되는 집을 다 태워버렸다.
그리고 주민 60여명을 이유불문 사살했다.

대충 학살을 완료했다고 생각한 군인들은 서둘러 점촌 앞 개울을 건너서 자혜리 쪽으로 가고 있는데, 시체더미에서 의식을 찾은 중년여인이 방곡에서처럼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네 이놈들 백정놈들아, 죄없는 인간을 이리 직여(죽여) 놓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하늘이 무심치 않을 것이다. 이 놈들아 죄가 있으면 대 봐라. 이놈들, 백정놈들!" 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개울을 건너 오솔길로 접어든 군인들이 되돌아와 여인을 쏘고 시체를 뒤져 살아있다 싶은 시체는 확인 사살을 가했다.
이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었는데, 확인 사살로 다 이승을 떴다.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 인간 살륙을 3대대는 맘 놓고 자행했다.]

위의 글은 '산청, 함양사건 유족회'가 펴낸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강희근 지음)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 대목은 가현학살에서 살아난 서정수(남, 65세)씨의 증언을 오래 간직하고 있던 유족회 전회장 김상곤씨의 기억을 더듬어 전해준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네요.

사건 발생 9년 뒤인 1960년 5월18일자 '국제신보'는 비극의 현장 르포 기사를 실었습니다.
르포 기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전해줍니다.

[마을 주민 가운데 배팔문씨는 오른쪽 어깨와 왼쪽 다리 두 곳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는데, 자기 위에 시체가 덮이는 바람에 살아났다.
하지만 그의 가족 15명 가운데 11명이 살해되고 겨우 4명이 목숨을 건졌다.

왼쪽 허벅지에 총알을 맞고도 살아난 우창순 노인은 9명의 가족을 모두 잃었다.
괴뢰군에 끌려갔다 유엔군 포로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오주한씨는 5명 가족 모두 죽고 없었다.]

'최화수의 지리산 산책' 제13호에는 마을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한 현장에서의 이런 삽화도 전하고 있습니다.

[시체더미 속에서 한 사나이가 몸을 털고 일어나더니 피범벅이 되어 꿈틀거리는 한 젊은 여자를 업고 50리 길을 달려 생초면 장터병원에 눕혔어요.
다음날 아침 여인이 눈을 뜨자 그는 "대한민국 사람 다 죽었다. 우리만 살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왼편 어깨와 오른편 손 관통상 수술을 끝낸 27세의 그녀 이름은 이음전이었지요.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 남편 오인덕, 네살 아들이 같은 장소에 끌려가 죄다 죽고 말았던 것이지요.]

방곡에서 양민을 무더기로 학살한 군인들은 점촌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오후 1시경 1개 소대를 건너편 멀찍이 있는 묵은터로 보내 주민을 학살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묵은터로 간 소대는 인명을 살상하지 않고 본부대가 학살하는 것으로 알도록 공포탄을 일거에 쏘면서 14호 되는 마을을 다 태워버렸어요.
이 소대는 마을에 있던 소와 돼지 등 가축들을 다 몰고 자혜리로 내려와 본부대와 합류했습니다.

자혜리도 집만 불태워지고 주민 전원을 서주리로 밀어보냈습니다.
가현 이후 학살 진도가 지나치게 느렸던 때문이라는 군요.
3대대는 서주리에서 학살을 실현하고 거창 신원면으로 돌아가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던 것이지요.
아, 그로부터 곧 저 끔찍한 서주리 양민학살 사건이 벌어진답니다.

  • ?
    김용규 2005.11.08 18:32
    전쟁이라는 이미지가 거의 떠 오르지 않는 지금의 현실에서 최화수님게서 연재하고 있는 방곡 사건의 이면 문제를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문제는 좌 우에 대한 사상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전쟁이 안겨다 주는 참담함, 흥분과 광란,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등을 다시 한번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잡지나 기사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때도 그랬고, 2차 대전때도 그랬고, 마루타 사건등등 그 어떤 전쟁 때라도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게 사실입니다. 당시 지방 사람들은 국군이 오면 국군편, 빨치산이 오면 빨치산 편인체 해야만 했다고 했습니다. 아들네들을 빨치산이 강제로 끌고 갔고, 작은 아들은 국군으로 군 입대를 했던게 당시의 지리산 인근의 상황이었으니까 논리적으로 이해를 하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당시는 오직 살아 남기 위한 것이 최고 목적이었을 테니까요.
  • ?
    오 해 봉 2005.11.12 00:23
    여지껏은 거창 양민학살사건 정도만 알았는데 여산 선생님 칼럼에서
    지리산 주위 산간마을의 여러학살 사건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알게된게 다행이고 감사 하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피해당하신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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