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3)

by 최화수 posted Oct 0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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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은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중심이 되어 1951년 2월7일(음 1워2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의 명목으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과 유림면 일원에서 양민 705명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학살 현장은 금서면의 가현, 방곡, 휴천면의 점촌, 유림면의 서주마을 등 4개 지역이고 관련 피해 마을은 앞 4개 마을 외에 자혜, 주상, 화계, 손곡, 화촌을 포함한다.
같은 작전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이틀 뒤부터 3일간, 1951년 2월9일에서 11일까지 양민 719명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거창 양민학살사건인데,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12월16일 대구고등군법회의는 9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각각 언도했다. 최종책임자인 신성모(국방장관)나 최덕신(사단장)은 무혐의로 재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이 재판은 같은 사건이었던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이 철저히 은폐, 축소, 조작되는 가운데 진행된 것이다. 재판과정에서의 피고들의 진술이 시종 앞뒤가 맞지 않았다는 점, 국방부의 해당 작전일지의 탈루 현상 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시인 강희근님이 쓰고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펴낸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국군이 무고한 양민을 이렇게도 많이 학살하다니요! 도무지 이해될 수 없고, 용남도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만행을 자행한 것일까요? 산청, 함양, 거창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는 어째서 1424명이라는 엄청난 주민을 학살했던 것일까요?

직접적인 원인으로 앞의 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적시합니다.
'11사단의 작전지구가 빨치산들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사건 직전에 적정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종래 군경에 피해를 많이 주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보복적 발본색원을 가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간접적인 원인들도 있습니다. 그 첫째가 '인적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11사단장 최덕신은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사단의 기본작전을 제시했지요.
이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하게 확보하고, 부득이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 빈 들판을 남겨준다는 것이에요.

이 견벽청야 작전은 최덕신이 중국군 장교로 복무할 때 국부군이 즐겨 쓰던 작전명이기도 했답니다.
견벽청야 작전이 국군부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의 중심이 된 것도 최덕신이라는 중국군 출신이 사단장이 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군요.

그밖의 간접원인으로는 '6.25의 전황'과 '전쟁의 부도덕성', 그리고 부대적 요인, 전과적 요인, 심리적 요인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든 산청, 함양 양민들은 '견벽청야' 작전에 참담하게 희생되었으니 엄청난 비극입니다.
더구나 산청, 함양사건의 비극은 아직도 종결이 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글은 강희근 지음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에서 발췌초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