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1)

by 최화수 posted Sep 1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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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펄펄 끓던 지난 8월 12일이었습니다.
부산의 한 환경단체 회원들과 함께 지리산을 1박2일 일정으로 찾게 됐습니다.
지리산을 안내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함께 길을 나선 것이지요.
40여명의 환경단체 회원에게 지리산의 어느 곳이 좋을 것인지, 필자는 나름대로 고심을 했답니다.

정말 무더운 삼복염천입니다.
지리산에서 더위를 쫓아낼 곳이라면 너무 많지요. 시설이 좋은 휴양림도 있고, 명경지수가 흐르는 계곡, 구름도 걸려 있는 능선, 아름답고 서정적인 강, 부처님의 자비가 서린 사찰도 있지요.
하지만 필자가 안내한 곳은 납량과는 전혀 무관한 곳들이었습니다.
덕천서원, 성모석상, 전구형왕릉...그런 곳들이었지요.

지리산에서의 두번째 날인 13일, 이 날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어요.
아침부터 날씨는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듯했어요.
이 날 필자가 안내한 곳은 날씨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었어요.
환경단체 회원들에게 필자가 좀 엉뚱한 놈으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필자가 안내한 곳은 능선도 계곡도 사찰도 아닌, 추모공원이었어요.
정확하게는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지요.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722번지 일원 2만2000평이 그 현장입니다.
이곳은 이른바 '산청 함양사건' 합동묘역으로 2001년 12월13일 착공 이후 4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거의 준공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합동묘역과 희생장소 보존지역, 참배단과 참배광장, 위패봉안각과 복예관, 위령탑과 회양문, 관리동 등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답니다.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새겨놓은 새 명소이지요.

'산청 함양사건'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건의 개요는 이 칼럼('최화수의 지리산 산책') 제13, 14호(2002년 2월)에 이미 실려 있습니다.
지리산이 안고 있는 현대의 비극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니까요.
1951년 2월7일 설 다음날, 지리산 양민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국군들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이 되었답니다.

당시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공비토벌작전을 벌이고 있었어요.
이들은 '견벽청야' 작전명에 따라 명절을 즐기고 있던 지리산 주민들을 떼죽음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지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지서 무려 705명의 양민을 참혹하게 살해했답니다.
양민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총탄을 맞고 쓰러졌던 것이에요.

구형왕릉 들머리인 금서면 화계리에서 엄천강을 따라 서쪽으로 잠시 거슬러 오릅니다.
자혜리를 지나면서 엄천강을 버리고 방곡천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따라갑니다.
이 골짜기를 계속 따라들면 지리산에서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온 마을인 오봉리에 닿게 되지요.
오봉마을에선 왕등재나 새재가 눈앞에 바로 올려다 보입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첩첩오지였던 방곡 골짜기였어요.

지금은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있는 곳까지 2차선 포장도로가 열려 있습니다.
추모공원의 규모나 시설도 놀랄만합니다.
'원혼소생상(寃魂甦生像)'이란 위령탑도 대단하고, '비탄의 벽'과 '고통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물들도 비극의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려 줍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강희근 시인의 헌시(獻詩)!
필자가 환경단체 회원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를 이 '헌시'가 설명해줍니다.

'양민을 적이라 하고
작전을 수행했던 이상한 부대
하늘 아래 있었습니다'
강희근 시인의 헌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를 토하며 되묻고 있답니다.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