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荒山大捷)과 승전비(2)

by 최화수 posted Jan 2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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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지리산 변방의 이 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얼마만한 무게로 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첩(大捷)'이란 이름이 시사하듯이 이는 왜구의 우리나라 침탈 만행에 치명타를 날려 쐐기를 박은 것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황산대첩은 세계 해전사(海戰史)를 바꾼, 함선에 함포를 장착한 '과학 전쟁'과 그 뿌리를 함께 합니다.
또 있어요.
이성계(李成桂)에게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원동력을 준 것이지요.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만약 황산전투에서 이성계가 왜구에 패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선 500년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황산대첩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꿈도 꾸지 못 했을 것이에요.

황산대첩, 거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보입니다.
그것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는 획기적인 전환의 시기이지요.
또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인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갈등, 그 과정의 적나라한 면면도 엿볼 수 있습니다.

황산대첩을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요.
황산(荒山)이 위치한 운봉고원의 지리와 역사적 발자취입니다.
운봉의 옛 이름은 운성으로 예부터 학문과 절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합니다.
이 지방의 큰 자랑은 '동편제 탯자리'인데, 가왕(歌王) 송흥록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창들을 배출해냈어요.  

운봉은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바래봉 철쭉의 화원처럼 전원 풍광이 평화롭고 아릅답지요.
국내 최초의 면양시범단지가 들어섰을 만큼 고원 일대는 드넓은 들판이 목가적 풍취를 자아냅니다.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말이 운봉고원과 너무 잘 어울리는 거에요.

하지만 운봉의 역사적 운명은 결코 순탄치가 않습니다.
운봉은 예부터 천연 요새로서 전략요충지로 이용됐어요.
운봉을 장악하면 삼남을 장악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삼한시대부터 이곳에서 곧잘 벌어진 전투는 근대의 빨치산과 토벌군경 격전까지 이어졌답니다.

원래 남원은 백제 땅이었고, 운봉은 신라 땅이었어요.
운봉은 특히 백제와 신라가 서로 산성을 쌓아 대치하던 국경지대였습니다.
백제는 초고왕 23년(188년)과 무왕 3년(602년), 무왕 17년(616년)에 각각 신라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했고, 백제 동성왕 6년(신라 소지왕 6년, 484년)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모산성 아래에서 격퇴시키기도 했어요.

운봉의 서쪽은 아흔아홉 고비의 유명한 여원치(女院峙)가 자리합니다.
남원에서 동북쪽으로 10킬로미터, 해발 485미터로 이곳에서부터 운봉고원이 열립니다.
여원치에는 암벽에 왼쪽 젖가슴이 잘린 여신상이 새겨져 있을 만큼 절절한 사연이 많아요.
황산대첩을 이끈 이성계도 이곳에서 결정적 현몽을 꾸게 됩니다.

운봉 동쪽은 인월(引月)이지요.
황산대첩을 위해 이성계가 그뭄밤에 보름달을 끌어올려 전투를 했다고도 하고, 또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달을 중천에 끌어다 매어놓고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 전설이 있지요.
그래서 마을 이름도 달을 끌어당겼다는 뜻의 인월인데, 예부터 함양과 남원의 군사기지로서 막중한 역할을 한 곳입니다.

운봉 벌판을 적시며 흐르는 만수천은 인월을 거쳐 실상사 앞으로 흘러듭니다.
이 만수천이 뱀사골 등에서 흘러내리는 지리산 계수와 합쳐져 임천이 되고, 다시 엄천, 엄천강, 남강,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흘러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날 왜구는 이 물줄기를 배를 타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 실상사 앞까지 진출했다고 합니다.

지리산 실상사는 왜구와 격전을 벌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실상사에는 일본을 누르는 풍수전설이 많이 전해오기도 하지요.
'부연폭포의 솥'에 얽힌 이야기도 그 하나입니다.
이 실상사도 운봉과 지척간의 거리입니다.
운봉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알게 해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