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마천장이 생기기 전, 마천 사람들은 오도재를 넘어 함양까지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합니다.
칠선계곡 입구 임천의 금계부락에서 창원~구양리 등구~촉동을 거쳐 오도재를 넘어 살구징이와 월평리로 내려와 다시 지안재를 넘어 조동을 거쳐 함양장터에 이르는 무려 30릿길이었지요.
변강쇠와 옹녀는 마천 사람들이 함양장에서 장을 보고 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따라 조동~지안재~월평~살구징이~오도재~촉동~등구마을...이렇게 지리산속으로 들어왔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그런데 변강쇠와 옹녀가 지안재를 넘은 뒤 휴천면 월평마을에 머물렀느냐, 거기서 다시 오도재를 넘어 마천면 등구마을까지 넘어와서 정착했느냐가 알쏭달쏭한 것이에요. 두 가지 주장이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1489년 이곳을 넘었던 김일손의 <속 두류록>은 이 고개에서 절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썼습니다.
'...가도 가도 맑은 물줄기, 아름다운 산자락의 연속인데, 얼마를 더 올라 한 고개를 넘는데 종자가 말 고삐를 당겨쥐며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가셔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절은, 무슨 절을 하는가?" 물으니 천왕사당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천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더 따지지 않고 말에 채찍을 쳐서 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그런데 이곳은 오디고개-오도신(悟道神)의 고개라 하여 지금도 신의 돌비가 서있답니다.
사실 변강쇠가 살았던 곳이 월평마을이든, 등구마을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어느 쪽이든 크게 보면 모두 같은 지리산이기 때문입니다.
변강쇠와 옹녀가 많은 산 가운데 지리산을 선택한 까닭이 있었답니다.
<가루지기 타령> 사설에 그것이 나오지요.
"동 금강(금강산) 석산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향산(묘향산) 찬 곳이라 눈 쌓여 살 수 없고,
서 구월(구월산) 좋다하나 적굴(도적소굴)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지리산) 토후하여 생리가 좋다하니 그리 가서 살러가세."
월평리와 등구마을을 넘나드는 고개인 오도재는 천왕봉~노고단의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인 전망대이기도 하지요.
이곳에 변강쇠와 옹녀의 쌍묘가 조성돼 있답니다. 이 묘는 '변강쇠 옹녀 바로알기 선양회'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군요.
변강쇠와 옹녀가 산 마을이 월평리라고 주장하는 측도, 등구마을이라고 주장하는 측도 오도재 쌍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답니다.
함양군은 이 오도재에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야외전망대를 비롯하여 장승공원과 ' 변강쇠 옹녀 이야기관' 등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오도재를 변강쇠와 옹녀의 유적지로 개발하는 것은 함양군의 주요 관광개발 사업의 하나일 거에요.
함양군은 조동~지안재~월평리~오도재~촉동~등구~금계마을을 2차선 도로로 확포장하고 있는데, 함양읍에서 지리산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지름길이기도 하지요.
함양의 이 오도재는 남원의 백장암계곡과 삼봉산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자리합니다. 삼봉산 산줄기로 변강쇠의 두 유적지가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등구마천에 살던 변강쇠와 옹녀가 백장암계곡에 가서 노닐었던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고, 남원 땅이 <가루지기 타령>의 고향이란 말도 틀릴 것이 없겠네요.
함양 오도재의 '변강쇠 옹녀 이야기관'과 남원 백장암계곡의 '변강쇠 옹녀 공원'은 수㎞ 거리에 불과합니다.
지리산 답사 코스로 변강쇠 옹녀의 두 공원이 서로 비교 보완의 역할을 하는 것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원의 변강쇠와 옹녀이든, 함양의 변강쇠와 옹녀이든, 그것이야 아무런들 뭐 어떠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