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잔치, 피아골의 대축제(2)

by 최화수 posted May 1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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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에 무슨 잔치냐? 피아골이라면 축제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이런 선입관이 지배적이다시피 합니다.
빨치산의 지리산 혈전을 다룬 영화 <피아골> 때문만도 아니긴 합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피아골은 처절한 전쟁의 상흔들을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왕시루봉능선과 불무장등 사이에 위치한 피아골, 그 수려한 계곡은 연곡사(燕谷寺)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 1부에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며느리가 불공을 드리러 이 연곡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기에 연곡사는 구한말(舊韓末)의 병화로 소실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 입산 1호로 연기조사가 세웠지요.
하지만 연곡사의 운명은 화엄대찰의 위엄을 지녀오고 있는 화엄사와 너무나 대비가 됩니다.
화엄사와 달리 연곡사는 사찰 건물이 몇 차례나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스님들도 승병(僧兵)으로 나섰다가 전멸하는 등 수난이 많았던 게지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고전장(古戰場) 석주관(石柱關)이 피아골 입구와 가까이 자리하고, 연곡사 스님들이 석주관 전투에 승병으로 참가하여 산화한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연곡사에 들렀던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임진란 때 의병 이원춘(李元春)과 '석주관 전투'를 의논했다고 하지요.
바로 그 때문에 연곡사는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는 운명을 맞이했답니다.

구한말 의병대장 고광순(高光洵)이 수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연곡사를 본거지로 왜병과 싸우다 장열하게 순국합니다.
연곡사 경내에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져 있는 것도 그래서이지요.
하지만 연곡사는 그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또한번 소실됩니다.
병화는 그것으로도 그치지 않습니다.
연곡사는 피아골이 빨치산투쟁 때 구례군당 아지트가 되면서 또 병화로 잿더미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훗날 '남부군' 정치지도자로 활약한 이옥자(李玉子) 여인은 1948년 12월31일, 갓난아기를 안고 질매재에서 쪼그린 채 밤을 새웁니다. 그녀는 다음날 아침 가파픈 비탈길을 타고 피아골로 내려가 군당아지트에 닿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을 그녀의 딸 정지아는 <빨치산의 딸>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군당 아지트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마침 아침 준비를 하느라 콩을 삶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었다.
쌀이 떨어졌다고 다들 삶은 콩 한 줌씩을 아침밥으로 배식받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저만치 시아버지의 모습이 스쳐갔던 것이다.
"아버지!"
그녀는 포대기가 땅에 질질 끌리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시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시동생이 "형수!" 하고 외치며 뛰어왔다.
그녀가 막 시집왔을 때 젖먹이였던 일곱살 짜리 막내 시동생과 아홉살 짜리 시동생 둘이 시아버지보다 먼저 달려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반가워서 야단이었다.'

한 가족이 빨치산으로 입산한 그림이 무슨 하나의 그림처럼 한꺼번에 비춰보이는, 기막힌 광경이기도 하지오.
하지만 피아골의 역사는 이처럼 비극적인 사건만으로 채워진 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이를테면 다른 지리산 골짜기에선 볼 수 없는 축제가 열리고는 한 것이지요.

'남부군' 등 빨치산 부대가 군경토벌대와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서도 이 피아골에선 아주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이태의 <남부군> 하권, '피아골의 축제'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요.

'피아골에서 이현상(李絃相)으로부터 상훈을 수여하는 식이 거행되었다.
...그날 밤 피아골에선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추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댄스를 추며 흥을 돋우었다.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