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번져나는 '섬진강 그림'(1)

by 최화수 posted Oct 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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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은 가도가도 질리지가 않는다."
누군가의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도가도 질리지 않는 서정의 세계가 곧 섬진강이지요.
그래서 섬진강은 독립된 강이면서도 '지리산 10경'에 포함되었겠지요.

한국의 서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섬진강입니다.
하지만 이 섬진강에도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이 던져놓고 간 얼룩 자국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세제(洗劑)로도 지울 수 없는 '문명의 얼룩'입니다.
섬진강 강물은 마냥 낮고 평온하게 흐르는 것만은 아니지요.
우리들은 섬진강이 언제까지나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줄 것을 바랍니다.
하지만 그 바람을 헤집고 현대화(?)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거에요.

섬진강의 현대화?
그 상징적인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남도대교'를 넘나드는 '영호남 시내버스'가 그것입니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하천리에서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를 잇는 '영호남 시내버스'가 지난 10월20일부터 하루 다섯 차례씩 운행을 시작한 겁니다.
시내버스가 처음으로 영남과 호남지역을 오가며 운행한다고 하여 '영호남 시내버스'로 불린다고 하네요.

          
남도 대교

'영호남 시내버스'?
이런 표현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냄새'가 풍기는 듯합니다.
이 시내버스의 등장을 가능케 한 것이 저 요란한(?) 모습의 '남도대교'이지요.
지난 7월29일 개통된 남도대교는 '영호남 화합'을 강조한다면서 거대한 철골 아치를 세웠지요.
지리산, 백운산, 섬진강의 서정세계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철구조물이 아닌가 합니다.

하동읍의 섬진교와 구례 간전면의 간전교 사이의 섬진강에는 교량이 없습니다.
화개장터 앞에 '줄배'를 대신할 교량 건설은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었지요.
전남도와 경남도가 사이좋게 공사비를 나누어 부담한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영호남 화합'을 강조한다는 철구조물이 섬진강의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듯하네요.

"다리 길이가 350미터밖에 안 되는 데도 한강의 서강대교를 모방하는 듯 거대한 철골 아치를 세움으로써 지리산과 백운산, 그리고 섬진강을 점령군처럼 압도한다는 점이다. 여인의 허리 곡선처럼 부드러운 섬진강엔 그저 통나무 하나 걸치듯 주변 풍경과 어울리는 환경 친화적인 다리가 제격이다."(박강섭 / '섬진강을 바라보며')

화개장터 앞에 '영호남 화합'을 상징한다는 거대한 철골 아치의 남도대교가 들어섰으니까 영남과 호남을 잇는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섬진강 양안의 주민들이 시내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남도대교의 등장으로 밀려난 전통의 '줄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여운처럼 따르는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화개장터 앞 섬진강, 강 위에 줄이 걸려 있었지요.
뱃사공이 그 줄을 당겨 나룻배를 강 이쪽 저쪽으로 건너게 했습니다.
고작 한 두명의 승객을 싣고 줄배가 한가롭게 섬진강을 건너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그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의 가슴에는 또 얼마나 풍성한 생각들이 강물처럼 적셔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고요.

화개장터 앞 줄배는 10년 전에 등장했었답니다.
그 이전에는 뱃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가 사람과 짐을 실어날랐지요.
나룻배 이전에는 황포돛배가 하동포구 70리 물길을 거슬러 오르내리고는 했답니다.
황포돛배가 오르내리던 시절의 화개장터는 걸죽한 타령이며 온갖 물산이 넘쳐 파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화개장터의 새로운 상징처럼 육중한 철골 아치의 '남도대교'가 도도하게 서 있습니다.
그 다리 위로는 자동차들이 생생 편리하게 지나다닙니다.
황포돛배며 고기잡이배는 아주 전설 속으로 사라졌지요. 이제는 마지막 '줄배'마저 사라질 운명입니다.
고향의 추억 같은 배들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황포돛배며 고기잡이배를 대신하여 레프팅 보트와 모터 보트가 손살같이 섬진강 물살을 가르며 나타나고는 합니다.
섬진강 서정의 세계에 혼란이 일어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