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동천 '달빛초당(茶仙草堂)'(5)

by 최화수 posted Jul 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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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도 詩를 읊어
너울너울 들여놓은

엉겅퀴꽃 웃고 있는
화개골 침묵의 집

문덕산 그늘 아래서
그리움을 먹고 산다.

해종일 구름 따라
하늘바위 넘나들다

햇살이 드러누우면
음성공양 보시도 하며

紅塵에 물들지 않은
풍류객이 숨쉬는 곳.
            <김선희 / 달빛초당>
            *시조세계 시인회 사화집(1) <적멸이 꽃필 때까지>에서

나는 '달빛초당' 주인 碧沙 김필곤 시인을 십수년만에 만났습니다.
찾아간다, 어쩐다, 전혀 말 한 마디 없이 불쑥 찾아갔지요.
'섬호정' 오영희님을 비롯한 경향 각지 시조시인과 차인들에게 달빛초당은 이미 친숙한 사이인가 봅니다.
'달빛초당'을 노래한 시조작품 또한 적지가 않을 정도이니까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 7년이나 뒤늦게 달빛초당을 찾아간 것이지요.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든 나를 김필곤님은 첫눈에 용케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동안 무슨 말을 나누기보다 서로 쳐다보며 웃기만 했습니다.

부산 광복동에 '양산박'이란 포장마차가 있었어요.
80년을 전후하여 나는 이 포장마차에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했지요.
소주잔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어 마시던 때였습니다.
그곳에 간혹 김필곤 시인이 얼굴을 내밀고는 했어요.
그이나 나나 무슨 말보다는 씨익 한번 웃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었지요.

하지만 나는 김필곤 시인에 대한 아주 특별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이가 편집주간으로 정성을 바친, 차 문화계간지 '茶心(다심)'과 그 책의 발행인 원광(圓光)스님과의 특별한 사연입니다.

원광스님은 부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아주 의욕적인 활동을 편 '목마(木馬) 시동인회' 회원이었지요. 스님은 해인사에서 성철(性撤) 종정의 수좌로 지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스님은 난(蘭) 그림도 아주 잘 그렸는데, 부산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과 언론인들에게 두루 보시를 했었지요.

원광스님은 차 문화계간지 '茶心' 발간에 심혈을 쏟았어요. '茶心'의 모든 일을 전적으로 맡기고자 김필곤님을 편집주간에 기용했답니다. 그것만으로도 원광스님과 김필곤님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김필곤님의 역저 <신동다송>의 속표지 그림은 원광스님이 그렸어요. 원광 스님은 큰 항아리 그림에다 '金必坤 詩人'이란 제하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았습니다.

'여자 같은 남자
그를 만나면 바보가 된다
다소곳이 핀 꽃
꼭꼭 숨은 산하 이끼
그를 만나면
꿈노래 미리내를 듣는다.
일밖에 모르는 바보
그를 보고 있으면
뚝심 하나 돌아앉은
지리산 봉황새
바보 멋쟁이
속이 빈 茶장이'

김필곤 시인을 "바보 멋쟁이"라고 말한 원광스님은 1989년 12월2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진주 근교 국도에서 입적했어요. 그날 원광스님은 다솔사로 떠나기에 앞서 느닷없이 김필곤시인의 집을 찾아왔답니다. 스님은 김씨 가족에게 내의 한 벌씩 선물하고 떠나갔지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광스님은 그가 출가했던 해인사를 찾았다가 그날 아침에 부산으로 돌아와 목욕을 했고, 김필곤님의 집을 찾아 선물을 전하고 떠나갔지요. 그러니까 스님은 이미 자신의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님이 교통사고로 타계했다는 청천벽력의 전갈을 받은 김필곤 시인은 당장 진주의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스님은 이미 말이 없었지요. 불의의 사고로 느닷없이 스님을 떠나보낸 김필곤님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이는 사실 그 때부터 자신의 고향이자 차의 성지인 지리산 화개동천으로 돌아가 차와 더불어 지리산 생활, 지리산 사람으로 복귀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지녔을 법도 합니다. 그 소망의 결정체가 '달빛초당'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김필곤님의 '달빛초당'과 성락건님의 '다오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서로의 취향도 꽤 다른 편입니다.
하지만 나이도 비슷하고 '지리산을 닮은 지리산 사람'인 것이 공통점이지요.
김필곤님의 모습에서 성락건님의 이미지가 겹쳐지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김필곤님이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성락건님이 언제 다시 한번 와선 구폭동 문덕산을 함께 올라보기로 했는데..."
성락건님은 그 약속을 틀림없이 지킬 것입니다.
'달빛초당'은 그이에게도 아주 안온하게 생각되는 지리산 오두막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