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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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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시루봉에는 외국인선교사 수양관이 있습니다. 원래 이 수양관은 1925~26년에 노고단에 49동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벽돌 건물로 세워졌었지요. 하지만 노고단 선교사 수양관은 6.25전쟁을 전후한 빨치산과 토벌군경의 전투 와중에 잿더미가 됐답니다. 전란이 수습된 뒤 선교사 휴 린턴(한국명 인휴, 印休) 등은 당연히 노고단에 선교사수양관을 복구하고자 했지요. 하지만 노고단 현지를 찾은 그들은 '뜻밖의 사태'를 경험하고, 결국 그 장소를 왕시루봉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답니다. 그 뜻밖의 사태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폭력'이었지요.

휴 린턴의 아들이자 현재의 왕시루봉 수양관을 지켜오고 있는 존 린턴(한국명 인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버지 일행이 노고단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데, 태풍이 몰아쳐 왔다고 해요. 등산객들은 꼼짝없이 노고단에 갇혀 있게 됐는데, 준비가 허술했던 그들은 곧 먹을 것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군요. 배가 고팠던 등산객들은 아버지 일행의 텐트에 칼을 들고 들이닥쳤습니다.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위협한 것이지요.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노고단을 포기하고 말았어요." 우리는 6.25 전란 직후의 노고단의 한 단면을 인요한의 증언에서 엿보게 됩니다.

외국인 선교사수양관이 노고단에서 왕시루봉으로 옮겨간 것은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인 것도 같아요. 하지만 그 까닭이 등산객의 폭력 행사에 의한 것이라면 충격이 아닐 수 없지요. 지리산상에서의 등산객 폭력행사가 이처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최초일 듯합니다. 지리산상에서 폭력이 극악하게 행해졌던 것은 1950년대 후반기와 60년대 중반에 걸친 이른바 '도벌(盜伐)시대'였었지요. 도벌한 목재를 나르는 '목마로'와 계곡물을 막았다가 목재를 떠내려보내는 '도벌댐'이 생겨나고, 도끼를 든 '산림특공대'가 횡행하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당시의 도벌은 권력을 등에 업은 지방의 일부 토호 세력이 일확천금을 노려 회사 경영 형태로 운영을 했고, 여기에 동원된 인부들도 생계를 해결하는 호구수단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 현장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벌시대가 훨씬 지난 뒤에도 지리산에는 등산객의 폭력행사가 간간이 발생하곤 했었지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직영하는 지금의 세석산장 이전의 세석대피소에서는 관리인이 등산객에게 칼에 찔리는 등의 폭력사태가 빚어지고는 했답니다. 그러니까 지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산상 폭력행사가 근절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산악인들로부터 '지리산 산신령'으로 추앙을 받는 우천 허만수 선생과 관련된 미스터리입니다. 그이는 세석고원에 초막을 짓고 홀로 들어와 원시인처럼 살았지요. 그이는 통천문에 나무다리를 놓기도 하고, 조난자를 구조하거나 등산로를 열어주는 등으로 지리산 등산객을 위해 20여년을 헌신했어요. 경남 진주 출신의 그이가 지리산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춘 것은 1976년 6월이었지요. 진주산악인들은 "칠선계곡에서 증발하겠다"고 그이가 말했다면서, 아마도 칠선계곡 어딘가에서 종적을 감추었을 것으로 단정했었답니다.

하지만 허만수님은 스스로 '영원의 세계'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폭력배들에 의해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도 따르고 있답니다. 당시 노고단산장을 지키던 함태식님은 세석고원으로 허만수님을 자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더군요. "그는 말년에 밥은 입에도 대지 않고 술만 마셨다.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이 폐인과 다름이 없어 안타까웠다. 등산로 개설이나 인명구조 등 산악인들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했던 그가 나중에는 일부 난폭한 등산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이도 있었으니..."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지요.

또 당시 로타리산장을 지켰던 조재영님 역시 허만수님의 증발에 대해 함태식님과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더군요. "지난날 지리산은 너무나 거칠었다. 도벌꾼들이 아무에게나 도끼를 휘두르는가 하면, 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른 젊은이들이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근래에도 세석고원에서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허만수 선생의 증발에는 상당한 의문이 따르고 있다." 허만수님이 증발한 1976년은 물론,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등산객의 폭력이 저질러졌던 거예요. 더구나 우천 허만수님과 관련한 폭력(폭행치사?)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고 있으니 안타깝지요.

허만수님의 최후에 대한 미스터리를 규명하는 것은 후배 산악인들의 과제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수수께끼로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고인이 평소 말했던대로 스스로 '영원한 신비'의 세계로 찾아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요즘은 지난날과 같은 산상 폭력사태는 사라졌습니다. 폭력이 없는 오늘의 평화로운 지리산을 찾는 것은 축복이지요. 그러면 지금은 과연 폭력이 없는 것일까요? 등산로 곳곳에서 '언어폭력'과 마주쳐지지는 않던가요? 인터넷의 익명의 언어폭력도 엄청납니다. '폭력 없는 지리산', 그것은 아직도 정녕 이루지 못한 꿈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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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거사 2002.07.17 21:59
    지리산에도 사람사는 세상이치로 보니 벼라별 폭력이 횡행하는군요.이제는 넘쳐나는 산사람들의 폭력적인 행동양태가 문제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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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2.09.24 16:53
    50대후반 내눈에는 그리도 정답고 순박한 등산객들 이던데 이해가 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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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누리 2002.11.09 12:33
    사람이 느끼는 폭력이 이렇다면 지리산이 느끼는 폭력은 또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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