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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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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초여름으로 기억됩니다. 부산소설가협회의 '여름소설학교'를 모태로 만들어진 PEN산악회가 왕산 등산에 나섰지요.
엄천강변 화계리에서 대절버스를 내린 일행 40여명이 등산구 초입 전구형왕릉에서 한동안 분잡을 떨었어요.
그리고는 오솔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는데, 10분도 지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어요.
한 유명작가가 초등학생인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아이가 넘어져 다친 거지요.
그 바람에 일부 회원은 다친 아이를 돌보느라 산행을 포기하고 내려왔어요.

그런데 다시 구형왕릉으로 되돌아온 순간 그때까지 햇살이 쨍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이고 뇌성번개에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어요.
모두들 놀라 허둥거렸는데, 누군가 왕릉에서 장난질한 벌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설마 하니...!
하지만 얼마나 사납게 비가 쏟아지던지 공포심이 엄습한 것도 사실이에요.
전구형왕릉은 비와 뇌성번개와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더군요.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왕릉을 파다가 별안간 날아든 비, 천둥번개에 놀라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지요.

조선 정조 11년(1798년) 가뭄이 심해 산청 유생(儒生) 민경원(閔景元)이 주민과 함께 왕산 기슭에서 기우제를 올렸답니다.
제를 끝내고 산을 내려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는군요. 민경원 일행은 비를 피해 왕산사(王山祠)에 들어갔어요.
민경원은 왕산사의 연유를 캐물었지만 스님들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어요.
"큰 나무상자가 있긴 하지만, 뚜껑을 열면 절이 망한다고 해서...!"
민경원이 나무상자를 열어보니 '왕산사기', '수정암기' 등이 나왔어요.

여러 기록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왕이 신하를 보내 구형왕릉과 제사를 모시는 왕산사를 중수했다는군요.
고려 신종왕 4년(1021년) 산음현감을 시켜 왕산사를 보수케 했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선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소란을 벌였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그 뒤 인조 2년(1624년) 인종(印宗)이란 스님이 왕산사 중수에 나섰다는군요.
효종 1년(1650년) 법영(法永)스님이 폐허가 된 왕산사를 중수한 뒤 구형왕 위패를 땅에 묻고, 사우(祠宇)를 절로 바꾸어버린 거랍니다.

이를 지켜본 탄영스님이 '왕산사기(王山祠記)'를 지어 예부터 전해오던 유품과 함께 나무상자에 간수했어요.  
또 숙종 13년(1687년)에 '수정암기(水晶庵記)'가 쓰여져 같은 나무상자에 보관됐다는군요.
수정암기는 가락국 역대 왕의 별궁인 태왕궁(太王宮 水晶宮)의 내력을 쓴 것이지요.
이 기록을 종합하면 구형왕릉을 모신 능침 건물 왕산사는 임진왜란 이후 사당이 사찰로 바뀌어지면서 구형왕 위패는 땅에 묻히고 유품은 궤짝 깊숙이 숨겨지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이 돌무덤도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민경원이 '왕산사기'를 읽게 됨으로써 돌무덤이 다시 구형왕릉으로 밝혀진 것이지요.
김해김씨 후손들이 스님들을 상대로 소송을 일으켜 예조(禮曹)가 사찰의 불법 점유로 판결, 스님들이 물러났답니다.
순조 34년(1834년) 왕산사 주변 산림 벌채 금지령이 내려지고 왕산의 소유권이 김해김씨 종중 소유로 확인됩니다.
헌종 12년(1846년) 유생들이 왕산사를 헐어 그 재목으로 서당을 지으려다 김씨 후손들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어요.

고종 27년(1890년) 태왕궁이 노후하여 없어지고 그 자리에 태왕궁지비(太王宮址碑)를 세웠다가 홍수에 축대가 무너져 능아래로 옮깁니다.
1928년 7월 홍수로 수정궁 자리가 허물어져 연산문, 만동문, 화수정, 동제, 고자사 등의 건물을 현재 덕양전(德讓殿) 자리로 옮겼어요.
1955년 '수정궁' 현판을 '덕양전'으로 바꿔달게 됩니다.
1980년대 이후 김해김씨 문중에서 덕양전과 구형왕릉 일원의 성역화사업에 착수, 왕산 기슭의 구형왕릉과 수정궁 후신 덕양전의 위용을 갖추게 됩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나마 성역화작업이 이뤄진 것은 김해김씨 문중 힘이 뒷받침 됐지요.
하지만 일부 학자는 돌무덤을 탑으로 보는 등 그 미스터리가 죄다 풀린 것은 아니에요.
구형왕의 완벽한 행적은 인근에 있는 왕등재 토성과 국골의 추성산성(楸城山城), 얼음터와 두지터 등의 비밀이 베일을 벗어야 밝혀지겠지요.
하지만 그 진정한 발자취는 학계에서도 규명하지 못 하고 있어요.
산악인이자 향토사학자인 김경렬님이 개인적으로 이만큼이라도 접근한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지리산 반야봉 북쪽 골짜기에 마한 피난도성 '달의 궁전(월궁)'이 존재했고, 왕산 기슭에 가락국 별궁 '태왕궁(수정궁)'이 자리했다는 사실은 지리산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일 수가 있지요.
그런데 '달의 궁전(월궁)'이나 '태왕궁' 또는 '수정궁'의 사실적 자취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하게 사라지고 없답니다.
왕국의 별궁이 사당으로 바뀌고, 다시 사찰로 바뀌어지는 과정도 기가 막히지요.
그보다 우리 모두는 지리산 역사의 뿌리에 대한 인식에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닐까요?

  • ?
    솔메거사 2002.02.28 13:34
    년전에 지리산언저리를 돌다가 '전구형왕능'을 돌아보며 가락국의 衰亡에 대한 의문과 복원정화된 시설에 대한 실망감을 갖었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 ?
    정종환 2002.03.20 20:41
    민간설화로는 왕이 마천에 난을 피했다가 죽은후 시신을 그곳으로 옮겼다하며, 학계는 고구려식이며 4개가 있고 만주에는 많다고함.광개토분은 후기형으로 위에 누각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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