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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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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세상은  난마(亂麻)와 같습니다. 삼 가닥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지요.
아니, 난마를 풀어야 할 쾌도(快刀)까지 썩어 문들어져 있어요. 권력 핵심부까지 부정부패에 찌들려 악취가 진동합니다.
힘없는 민초들은 도탄에 빠져 기댈 언덕조차 찾지 못하지요. 이 참담한 현실에서 그래도 지리산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지리산에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선생이 있고,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이 있지요. 한 줄기 청량한 바람처럼 고고한 선현들의 정신세계가 그립지 않습니까!

'푸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
남명은 지리산 들목 백운동계곡에서 이렇게 탄식했어요. 500년 전 그이의 그 한탄이 지금 우리 현실을 한 치의 굴절도 없이 비춰주고 있으니 인간의 탐욕은 시대를 초월하는 모양이에요.
남명은 지리산 화개동천을 찾아서는 '맑은 냇물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우뚝 선 봉우리에서 몸가짐이 반듯해지네' 란 시(詩)를 읊었습니다.
그이의 가르침은 이 싯구에도 담겨 있는 거에요.

나는 지리산의 계곡과 마주치면 어김없이 얼굴을 붉히는 버릇이 있답니다.
내가 처음 지리산 계곡을 찾았을 때, 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을 보고 "하이구, 빨래 한번 했으면 좋겠네!"하고 소리쳤거던요.
나는 여인네들이 흐르는 물에 빨래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답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에 자란 때문인가 봐요.
하지만 지리산계곡에서 빨래는 커녕 세수조차 못하게 하는 오늘이지요.
계곡을 오염시키는 문제로 무안해진 것이 아니에요. 내가 얼굴을 붉히게 된 것은 남명의 시 한 수 때문이었어요.

1561년 회갑 때 지리산 덕산에 정착한 남명은 이런 시를 읊었지요.
'봄산 어디엔들 방초야 없으련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우니 자랑스럽다.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으리오만, 맑은 물 10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다.'
그이는 지리산 계류를 식량(食糧)으로 보았어요. 고향의 집과 전답 등을 버리고 오직 빈 몸으로 찾아들었지만, 천왕봉을 올려다보며 몸가짐을 반듯하게 가다듬고, 맑은 냇물에서 정신을 명징하게 추스린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고작 '빨래' 따위나 생각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 부끄러움을 자각한 뒤로 나는 비로소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나 구례의 매천사(梅泉祠) 등에 눈뜨게 됐어요.
퇴계와 함께 16세기 영남의 양대 학맥을 형성한 남명의 가르침 '경의(敬義)'의 뜻이며, 한말 우국지사 매천의 절명시(節命詩)를 가슴에 담기 시작했지요.
특히 나는 거리가 가까운 덕산을 자주 찾아 남명의 발자취를 나름대로 더듬어보았어요. 산천재와 별묘, 덕천서원과 묘소, 입덕문과 덕암, 그리고 탁영대 등을 두루 살펴보고는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곳들에 대한 답사 안내까지 했답니다.

하지만 나는 요즘 남명으로 하여 또다른 얼굴 붉히기를 한답니다.
산천재와 묘소, 덕암과 입덕문 등을 찾는 것으로 남명의 지리산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남명은 생애 마지막 12년을 덕산에서 살았어요. 그 기간에 그이가 가장 많이 찾아간 곳은 어디였던가요?
덕천강변의 덕암이었던가? 내원사계곡이었던가? 아니면 대원사계곡이었던가?
그런 곳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이가 가장 즐겨 찾았던 곳은 백운동계곡, 곧 용문동천(龍門洞天)이었답니다.

지리산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인물은 고운 최치원이에요. 그는 지리산 곳곳의 바위에 이름들을 명명하여 자신의 글씨로 각자(刻字)를 남겼어요
쌍계사 대웅전 앞의 '진감선사 대공탑비' 비문 뿐만 아니라 '雙磎石門(쌍계석문)', '三神洞(삼신동)', '洗耳岩(세이암)' 등의 각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지리산에서 12년을 살았던 남명은 자신의 각자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이의 족적을 제대로 추적하자면 그 각자가 어디 있는지 찾아냈어야 옳을 것입니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었는지 모르겠네요.

부끄럽게도 나는 올해 들어서야 그것을 깨닫고, 그래서 뒤늦게 허겁지겁 백운동계곡을 찾게 된 겁니다.
아, 백운동계곡! 목화와도 같은 순수 백색계곡의 경이로운 세계가 지리산 들목에 절묘하게 숨겨져 있었다니!
'白雲洞(백운동)', '龍門洞天(용문동천)',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등 남명의 각자들이 그곳에만 있지요.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知沼)', 옳은 소리만 듣는다는 '청의소(聽義沼)'도 있어요.
여기 와 보지도 않고 남명을 얘기했다니, 그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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